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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화려한 선전’과 흔들리는 민주주의

등록 2009-10-11 16:50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4. 늘어진 인생 진도표- 인생을 계획있게 가꾸는 길
5. 프로파간다, 환상과 허상의 경계선
6. 아파트, 대한민국을 접수하다 - 거주문화의 비밀

“높은 관세는 물가를 끌어올립니다. 관세를 낮출 저에게 한 표를 던지십시오!”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시절, 선거 유세에서 흔히 쓰던 말투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할 테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높은 관세 덕에 국내 산업이 보호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미 굳어진 여론을 돌리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만큼 어렵다.

재주 있는 선전가라면 다른 식으로 시민들을 설득할 테다. 먼저, 관세 탓에 피해 받는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수입산 양모 값이 올라 겨울나기 어려운 서민들이라면 더욱 좋겠다. 이들을 모아 집회를 연다. 모임 장소에는 높은 관세에 반대하는 저명한 인물을 불러온다.

유명인사가 오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기자들도 몰려들게 되어 있다. 집회 상황은 언론으로 널리 알려진다. 곳곳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달아오른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높은 관세에 반대 목소리를 낼수록, 더 많은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내는 관세를 낮추자는 주장이 우세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라디오 유세는 바로 이때 해야 한다.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먼저 군중의 생각부터 돌려놓아야 하는 까닭이다.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은 이처럼 여론을 돌려놓는 기술을 말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사람이다. 그는 담배와 여성의 권리를 묘하게 연결시켜서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 담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담배가 여성들에게 ‘자유의 횃불’이며 여권의 상징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프로파간다>(1928)에는 버네이스의 선전 노하우와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프로파간다>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공존
<프로파간다>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공존

그는 “군대가 병사들의 몸을 통제하듯, 선전으로 여론을 조목조목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집단은 생각하지 않는다. 충동, 습관, 감정에 따라 휩쓸릴 뿐이다. 결정을 내릴 상황이 오면, 군중은 대개 뛰어난 지도자의 처신을 따른다. 널리 존경을 받는 인물 한둘이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이유다.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면? 대중은 이미 사회에 퍼져 있는 편견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여론몰이를 할 때는 영향력 큰 인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버네이스는 베이컨을 아침 식탁에 올리고 싶어 하는 양돈업자를 예로 든다. 베이컨을 사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설득해 봐야 큰 효과가 없다. 베이컨 소비를 크게 늘리고 싶다면 유명한 의사에게 매달리는 쪽이 낫다. 그가 베이컨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을 펼치게 만들어야 한다. 베이컨에 대한 여론이 바뀌면 판매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버네이스는 절대 ‘내가 ~을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이루어졌다’, ‘~하게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수동적인 표현을 쓸 뿐이다. 상황 전체를 바꾸어, 사람들 스스로 원해 선택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선전은 토끼몰이 하듯 군중 스스로가 누군가의 의도대로 달려가게 만든다.

버네이스를 나쁘게 보는 쪽에서는 그를 ‘민주주의의 암살자’로 여긴다. 하지만 버네이스 자신은 선전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기술로 여겼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일은 하나둘이 아니다. 치약 하나를 고르는 데도 수많은 조건과 경우의 수를 따져보아야 한다. 중대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만약 선택을 대중에게 던져놓으면 어떻게 될까? 과연 시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복잡한 조건들을 모두 따져보며 최선의 결론을 내릴까? 오히려 선택 결과는 최악이 되기 쉽다. 그렇다면 현명하고 양심적인 엘리트들이 여론을 조종하는 쪽이 낫다. “암거위 요리에 쓰는 양념은 수거위 요리에서도 통한다.” 선전은 상품판매에서뿐만 아니라 여론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도 요긴하다. 실제로 버네이스는 선전을 이용하는 엘리트들의 도덕성을 무척 강조했다. 담배가 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금연 광고에 열심히 매달리기도 했다.

<이미지와 환상>
다니엘 부어스틴 지음, 정태철 옮김. 사계절
<이미지와 환상> 다니엘 부어스틴 지음, 정태철 옮김. 사계절

그럼에도 선전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대니얼 부어스틴은 <이미지와 환상>(1962)을 통해 선전의 한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선전 기술은 광고와 함께 점점 세련되어갔다. 급기야 가짜가 진짜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지금의 선전은 가짜와 진짜를 묘하게 뒤섞어 놓는다. 대중을 사로잡는 이미지도 그렇다. 더 이상 선전은 진짜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카메라 보고 열광하는 관중들 모습을 스타를 향한 환호로 편집한다 해도 항의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그만큼 조작은 이미 우리에게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어느덧 선전은 설득보다 사기(詐欺)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러는 가운데, ‘유명함’(fame)과 ‘위대함’(greatness)의 경계도 점점 흐려져만 간다. 예전에는 위대한 영웅이 유명세를 누렸다. 지금은 오히려 유명하기에 위대하다고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베스트셀러이기에 더 많이 팔리고, 아이돌 스타들은 인기 있기에 더 인기가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상업과 손을 잡고 발전한다. 둘 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성공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점점 더 위대함보다 유명함을 좇는 모양새로 바뀌고 있다. 그럴수록 판단력은 점점 흐려진다. 민주주의는 현명하게 깨어 있는 시민들에게 어울리는 제도다. 하지만 상업과 민주주의가 꽃핀 뒤에는 여지없이 강한 독재가 찾아들곤 했다. 선전은 생각이 좁고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들에게 더 잘 먹힌다. 선전 기법의 발달은 뜻하지 않게 민중을 우매하게 만든다. 화려한 선전이 우리를 어리석음과 독재로 이끌지는 않는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_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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