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 학생들만 수월성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낡은 교육이다. 일반계고 명호고의 ‘모든 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은 현재 특권 계층에 머물러 있는 수월성 교육 앞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다. 사진은 박찬규 교장과 명호고 학생들.
[커버스토리]
● 새 프레임 짜는 부산 명호고 ●
부산 명호고 황원우(16)군은 최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봤다. 대비는 학교에서 했다. 정규 수업이나 보충 수업이 아닌 ‘특별 강의’를 국사 담당 교사한테 받았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특목고나 상위권 대학 진학에 유리한 고급 ‘스펙’ 가운데 하나다. 황군은 상위권일까? “사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어요. 1학기 중간고사 때 성적이 100등 정도였죠. 그래도 2학기 중간고사 때 40등까지 올랐어요.” 명호고의 특강은 학교가 우수한 학생들한테만 주는 특권이 아니다. 10명 안팎의 학생들이 모둠을 이뤄 꾸리는 ‘소수 특강’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학교가 일방적으로 대상을 정하고 과목과 교사를 배정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친구를 모으고, 배울 과목과 교사를 정하는 상향식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명호고는 ‘모든 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을 하는 학교다. 이 학교 박찬규 교장이 2005년부터 4년 동안 재직한 부산 금곡고는 한국교육개발원이 2006년에 낸 ‘모든 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이라는 연구보고서에 대표 사례로 제시됐다. 박 교장은 올해 개교한 명호고에 공모 교장으로 부임해 금곡고의 수월성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박성익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본래 수월성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는 모든 인간이 타고난 재주와 적성을 발현시키는 교육을 의미한다”며 “외국어고나 과학고 학생들처럼 한정되고 특정한 교육 대상만 염두에 둔 교육을 수월성 교육의 전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에 제정된 미국 연방정부의 공법은 “모든 학생은 높은 수준으로 학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외고·과고 진학반 아닌 모든 학생 공평하게 참여
지난 3일, 부산 명호고의 방과후 보충수업이 시작되자 쿵쿵거리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교정을 울렸다. 학생들은 교실에 앉아 있고 교사만 움직이는 여느 학교의 정적인 풍경과는 달랐다. “학생들이 자기가 선택한 보충수업 강의를 찾아 이동하는 소리지요. 학생들이 하루 7시간을 똑같은 시간표로 공부하는데 방과후 보충수업 2~3시간까지 똑같이 공부하는 건 학생들이 자기한테 맞는 공부를 하는 데 맞지 않아요. 우리는 선택형 보충수업을 합니다.” 박찬규 교장의 말이다. 명호고에서는 같은 반 학생이라도 방과후 보충수업의 시간표는 모두 다르다. 선택형 보충수업을 하는 학교는 많지만 명호고의 보충수업은 강사별 선택이 아니라 강좌별 선택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박 교장은 “강사별로 선택하게 하니 아이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강의를 찾기보다 인기 강사만 쫓아다니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더라”며 “교사 실명제는 하지 않고 다만 강좌의 수준을 정확하게 기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조예진(16)양은 영문법 문제집으로 하는 구문독해 수업을 듣고, 김은현(16)양은 교과서를 복습하는 내신 대비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은 한 학기에 세 강좌를 선택해 듣는데 1~3지망을 정하면 자동적으로 배정이 된다. 1지망 강의를 못 듣게 된 학생한테는 가산점이 부여돼 다음 수강 신청을 할 때 유리하다. 평판이 좋은 교사를 상위권 학생들한테만 배정하는 대다수 학교에는 없는 ‘형평성’을 고려한 제도다. 10명 안팎으로 모둠 이뤄 내신 특강부터 음, 미, 체까지 학생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강의뿐만 아니라 흥미나 적성에 맞는 강의도 선택할 수 있다. 미술, 체육, 컴퓨터 등의 특기 적성 과목도 당당히 보충수업 과목으로 개설된다. 고등학교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날 미술실에서 미술 보충 수업을 듣고 있던 양리라(16)양은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하고 싶어서 학원을 다니는데 입시 과목인 드로잉만 배운다”며 “보충수업 때 포토샵이나 그래픽 디자인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누구한테나 수월성 교육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수준별 이동수업의 운영에서도 드러난다. 명호고는 모두 다섯 단계로 학생들의 수준을 나눠 수업을 한다. 4개 학급을 다섯 수준으로 나누는데 최하위권 학생들은 다시 두 학급으로 나눈다. 4개 학급이 6개 학급으로, 전체 8개 학급이 수준별 이동수업을 할 때는 12개 학급으로 쪼개진다. 최하위권 반에는 2명의 교사가 투입된다. 이른바 협력수업(co-teaching)이다. 최하위권 반을 지도하는 최운영 교사는 “수학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수학에 대한 흥미가 아예 없는 학생들이 많아서 동기 부여가 우선 중요하다”며 “초코파이 문제, 사탕 문제 등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문제를 풀면 보상으로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수업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명호고의 수월성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학생들은 없다.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수월성 교육으로 이해하는 보통의 인식과는 다르다. 김미숙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 소장은 “수월성 교육은 학생 개개인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이루도록 추구하고 지원하는 교육”이라며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학생 모두 이런 목표를 달성하도록 지원받아야 하며 이런 맥락에서 수준별, 맞춤식 교육은 수월성 교육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과목, 교사 직접 선택 ‘상향식’ / 소질 키우는게 진짜 수월성 교육 학생 개개인의 수월성을 극대화하는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은 특목고나 영재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는다. 소수 특강으로 개설된 수학 심화반이 그랬다. 수학 심화반 특강을 맡아 지도한 김현구 교사는 “강의, 토론, 글쓰기, 발표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며 “영재학교 수준에는 못 미칠 수 있지만 2~3년 동안 이런 수업을 받고 수학의 맛을 느낀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 특목고 나온 아이들과 공부할 때 그리 뒤처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학 심화반을 조직한 박시웅(16)군은 “글 쓰고 연구해서 발표하는 게 정말 어려웠지만 수학은 문제 풀이보다 기본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며 “2기 때 친구들과 함께 또 이런 특강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 교장은 앞으로 수학 심화반을 학습동아리로 키울 계획이다. 학습동아리는 금곡고가 부산시에 퍼뜨린 우수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의 모델이다. “문과 하나, 이과 하나 이렇게 학습동아리를 만들어서 수업 시간에는 못하는 고난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겁니다. 교수들 특강도 듣고 자기들끼리 협동 프로젝트도 하고요. 서울대, 포항공대, 카이스트 이런 데서 요구하는 심층 면접에 대비도 되지요.” 금곡고에서는 이런 학습동아리를 운영해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 주요 이공계 대학에 합격자를 대거 배출했다. 금곡고에서 학습동아리를 운영한 김경환 교사(부산 다대고)는 “주말에 강의, 토론, 글쓰기, 발표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가끔 포항공대나 서울대에서 교수들을 모셔 와 특강도 진행했다”며 “가정 형편이 안 돼 특목고에 못 갔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학생들이 일반계고에도 숨어 있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명호고는 ‘모든 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을 하는 학교다. 이 학교 박찬규 교장이 2005년부터 4년 동안 재직한 부산 금곡고는 한국교육개발원이 2006년에 낸 ‘모든 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이라는 연구보고서에 대표 사례로 제시됐다. 박 교장은 올해 개교한 명호고에 공모 교장으로 부임해 금곡고의 수월성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박성익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본래 수월성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는 모든 인간이 타고난 재주와 적성을 발현시키는 교육을 의미한다”며 “외국어고나 과학고 학생들처럼 한정되고 특정한 교육 대상만 염두에 둔 교육을 수월성 교육의 전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에 제정된 미국 연방정부의 공법은 “모든 학생은 높은 수준으로 학습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외고·과고 진학반 아닌 모든 학생 공평하게 참여
지난 3일, 부산 명호고의 방과후 보충수업이 시작되자 쿵쿵거리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교정을 울렸다. 학생들은 교실에 앉아 있고 교사만 움직이는 여느 학교의 정적인 풍경과는 달랐다. “학생들이 자기가 선택한 보충수업 강의를 찾아 이동하는 소리지요. 학생들이 하루 7시간을 똑같은 시간표로 공부하는데 방과후 보충수업 2~3시간까지 똑같이 공부하는 건 학생들이 자기한테 맞는 공부를 하는 데 맞지 않아요. 우리는 선택형 보충수업을 합니다.” 박찬규 교장의 말이다. 명호고에서는 같은 반 학생이라도 방과후 보충수업의 시간표는 모두 다르다. 선택형 보충수업을 하는 학교는 많지만 명호고의 보충수업은 강사별 선택이 아니라 강좌별 선택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박 교장은 “강사별로 선택하게 하니 아이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강의를 찾기보다 인기 강사만 쫓아다니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더라”며 “교사 실명제는 하지 않고 다만 강좌의 수준을 정확하게 기재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조예진(16)양은 영문법 문제집으로 하는 구문독해 수업을 듣고, 김은현(16)양은 교과서를 복습하는 내신 대비 수업을 듣는다. 학생들은 한 학기에 세 강좌를 선택해 듣는데 1~3지망을 정하면 자동적으로 배정이 된다. 1지망 강의를 못 듣게 된 학생한테는 가산점이 부여돼 다음 수강 신청을 할 때 유리하다. 평판이 좋은 교사를 상위권 학생들한테만 배정하는 대다수 학교에는 없는 ‘형평성’을 고려한 제도다. 10명 안팎으로 모둠 이뤄 내신 특강부터 음, 미, 체까지 학생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강의뿐만 아니라 흥미나 적성에 맞는 강의도 선택할 수 있다. 미술, 체육, 컴퓨터 등의 특기 적성 과목도 당당히 보충수업 과목으로 개설된다. 고등학교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날 미술실에서 미술 보충 수업을 듣고 있던 양리라(16)양은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하고 싶어서 학원을 다니는데 입시 과목인 드로잉만 배운다”며 “보충수업 때 포토샵이나 그래픽 디자인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누구한테나 수월성 교육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수준별 이동수업의 운영에서도 드러난다. 명호고는 모두 다섯 단계로 학생들의 수준을 나눠 수업을 한다. 4개 학급을 다섯 수준으로 나누는데 최하위권 학생들은 다시 두 학급으로 나눈다. 4개 학급이 6개 학급으로, 전체 8개 학급이 수준별 이동수업을 할 때는 12개 학급으로 쪼개진다. 최하위권 반에는 2명의 교사가 투입된다. 이른바 협력수업(co-teaching)이다. 최하위권 반을 지도하는 최운영 교사는 “수학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수학에 대한 흥미가 아예 없는 학생들이 많아서 동기 부여가 우선 중요하다”며 “초코파이 문제, 사탕 문제 등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문제를 풀면 보상으로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수업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명호고의 수월성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학생들은 없다.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수월성 교육으로 이해하는 보통의 인식과는 다르다. 김미숙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센터 소장은 “수월성 교육은 학생 개개인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이루도록 추구하고 지원하는 교육”이라며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학생 모두 이런 목표를 달성하도록 지원받아야 하며 이런 맥락에서 수준별, 맞춤식 교육은 수월성 교육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과목, 교사 직접 선택 ‘상향식’ / 소질 키우는게 진짜 수월성 교육 학생 개개인의 수월성을 극대화하는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은 특목고나 영재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는다. 소수 특강으로 개설된 수학 심화반이 그랬다. 수학 심화반 특강을 맡아 지도한 김현구 교사는 “강의, 토론, 글쓰기, 발표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며 “영재학교 수준에는 못 미칠 수 있지만 2~3년 동안 이런 수업을 받고 수학의 맛을 느낀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 특목고 나온 아이들과 공부할 때 그리 뒤처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학 심화반을 조직한 박시웅(16)군은 “글 쓰고 연구해서 발표하는 게 정말 어려웠지만 수학은 문제 풀이보다 기본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며 “2기 때 친구들과 함께 또 이런 특강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 교장은 앞으로 수학 심화반을 학습동아리로 키울 계획이다. 학습동아리는 금곡고가 부산시에 퍼뜨린 우수학생을 위한 수월성 교육의 모델이다. “문과 하나, 이과 하나 이렇게 학습동아리를 만들어서 수업 시간에는 못하는 고난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겁니다. 교수들 특강도 듣고 자기들끼리 협동 프로젝트도 하고요. 서울대, 포항공대, 카이스트 이런 데서 요구하는 심층 면접에 대비도 되지요.” 금곡고에서는 이런 학습동아리를 운영해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 주요 이공계 대학에 합격자를 대거 배출했다. 금곡고에서 학습동아리를 운영한 김경환 교사(부산 다대고)는 “주말에 강의, 토론, 글쓰기, 발표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가끔 포항공대나 서울대에서 교수들을 모셔 와 특강도 진행했다”며 “가정 형편이 안 돼 특목고에 못 갔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학생들이 일반계고에도 숨어 있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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