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은(창동중2)양은 1학년 때부터 꾸준히 필기를 해왔다. 사진은 강양이 정리한 사회과목 학습지.
중학생, ‘공부하는 힘’이 열쇠다
교사의 말 집중해 핵심어만 짧게 요약해야
제대로 필기하면 교과서 흐름 이해에 도움
교사의 말 집중해 핵심어만 짧게 요약해야
제대로 필기하면 교과서 흐름 이해에 도움
선생님은 분필로 빼곡히 판서를 하고, 아이들은 정신없이 노트에 쓴다. 지울라치면 아이들은 “잠시만요, 잠시만요”를 외치며 “조금 기다려주세요”라고 애원한다.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노트필기’란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광경을 떠올린다. 하지만 요즘 학교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조금 다르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준비한 ‘학습지’(현장에선 ‘프린트물’보단 ‘학습지’란 표현 선호)를 펼쳐 놓고 설명을 들으며 필기를 한다. 학습지는 교사가 수업 진행용으로 준비한 보조자료다. 학습지엔 필수 개념과 학생들이 채워야 할 빈칸과 메모할 수 있는 여백이 충분히 마련돼 있다. 이현주(서울개웅중·사회) 교사는 “요즘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학습지를 활용한다”며 “학습지는 빈칸을 채워 넣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 ‘활동’을 하도록 구성돼 있어 아이들의 적극적 수업 참여를 이끌어낸다”고 밝혔다.
지난 23일, 중1 때부터 노트필기를 활용해왔다는 강규은(서울창동중2)양의 집에 찾아갔다. 책상 위에는 1학년 때부터 정리해온 학습지와 교과서 몇 권이 놓여 있었다. 강양은 “공부 잘하는 사촌언니가 중학생이 된 나에게 ‘수업중 필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줘 그 말을 따르게 됐다”며 “선생님 말씀 가운데 중요한 것을 골라 필기하다 보니 수업에 집중하게 되고, 이해도 잘됐다”고 밝혔다.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엔 “선생님들이 강조하는 단어나 자주 반복하는 개념들을 중요하다고 생각해 필기한다”고 답했다. 김종백 교수(홍익대·교육심리학)는 “필기하려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야 한다”며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는 핵심어를 뽑기 위해선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사의 말에 집중할 필요를 느끼고 실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강양의 학습지를 들춰봤다. 형형색색으로 잘 정리돼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색은 거의 안 쓰고, 정갈하게 정리만 잘돼 있었다. 이런 생각을 눈치챘는지 강양은 “색을 많이 안 쓰고 필기한다”며 “이유는 색을 가끔 쓰면 눈에 잘 들어오고 찾기도 쉬운데, 너무 많이 쓰면 중요한 것조차 찾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많은 학습 전문가들은 강양처럼 최대한 쉽고 단순하게 필기할 것을 강조한다. 필기는 노트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반면에 “수업 시간에 열심히 필기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ㄱ양(서울ㅊ중3)의 학습지는 다양한 색깔의 밑줄과 메모,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조금 답답해 보이긴 했지만, 수업 시간에 매우 충실하게 잘 받아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니 의아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생각이 들어 있지 않은 필기는 무의미하다”고 지적하며 “다 받아 적거나 노트를 꾸미기 위해 필기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 자극인 소리만 적는 것으로 지식과 연결되지 못하며, 중요한 것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필기는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복습용으로 활용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강양은 “시험 때 필기한 것 위주로 공부한다”며 “필기해 놓은 것을 다시 읽으면 수업 내용이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많다”고 답했다. 또 “선생님이 강조하기 위해 예로 들었던 이야기까지 떠오르기 때문에 교과서 내용을 흐름대로 따라가며 다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양은 덧붙였다. 김 교수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필기는 다시 읽었을 때 수업 상황을 환기시키는 도구가 된다”며 “마치 바둑 고수들이 ‘복기’(처음부터 다시 똑같이 두며 검토하는 것)를 완벽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 필기가 시험 때 위력을 발휘하는 가장 큰 이유를 묻자 김 교수는 “필기는 설명을 들으며 자신의 배경 지식에 맞게 해석한 내용을 받아 적는 것”이라며 “교사가 설명한 내용을 자신의 ‘이해의 틀’에 맞게 재해석해 구조화한 지식이기 때문에 많은 분량의 교과서 지식을 짧은 시간에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강양의 어머니 최미영(42) 씨의 말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규은이가 중학생이 된 뒤 필기를 처음 시작했을 땐 선생님 말씀을 길게 받아 적는 편이었는데, 차츰 핵심어 위주로 짧게 요약·정리하는 식으로 변하더라구요. 그러면서 공부 시간은 짧아지고, 성적도 꾸준히 올라 지금은 상위 1~2% 안에 들 정도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어요.”
필기는 설명이나 판서 내용을 그대로 베끼는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게 아니다. 필기는 수업이 끝난 뒤 언제라도 수업 내용을 떠올리기 위한 중요한 학습법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손으로 기록해 머리에 기억하라. 그리고 시험 볼 때 마치 책장을 넘기듯이 자신이 필기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면 누구나 ‘공신’(공부의 신)이 될 수 있다.
글·사진 정종법 기자 mizzle@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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