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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시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등록 2009-12-06 16:18수정 2009-12-06 16:30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12. 설득의 진화
- 수사학에서 너지(Nudge)까지
13. 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화를 찍는다면

14. 가족과 국가의 경쟁, 누가 살아남을까?

“폭탄이 탁자 밑에서 갑자기 터지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의 말이다. 그는 관객들을 스토리로 빨아들이는 방법을 일러준다. 관객들이 탁자 밑에 폭탄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도록 만들라.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급함을 느끼도록 관중들을 이끌어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뇌는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영화 속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슬퍼하고 기뻐한다. 다른 하나는 내용 진행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듯 화면 밖에서 전체 틀을 바라보고 생각한다. 영화가 호소력이 있으려면 이 두 가지 방향을 모두 사로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이 물음에 답을 주는 고전이다. 그러나 50쪽 분량의 이 책을 따라가기란 여간 버겁지 않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쉽게 설명한답시고 든 예를 종잡기 어려운 탓이다. 지금 시대에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 왕>을 제대로 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이 작품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을 적에는 누구나 떠올릴 만큼 아주 인기 있었을 테다. 지금의 <타이타닉>이나 <괴물>처럼 말이다. 2500년의 세월은 이해를 도왔던 사례들을 책을 못 읽게 막는 장애물로 바꾸어 놓았다. 위대한 고전들에 해설서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새겨들을 만하다면 현대인들이 알아듣게끔 ‘버전’을 바꾸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마이클 티어노가 쓴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현대 영화 제작자 관점에서 <시학>을 풀어준다. 티어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작품에서 가장 방점을 찍은 부분은 ‘플롯’(plot)이다. 플롯이란 작품의 얼개와 구성을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야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Say What the story demands) 일어난 일들이 앞뒤가 딱 맞아서 억지가 느껴지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여러 사건은 어느 하나라도 옮기거나 바꾸면 전체가 일그러져 버릴 만큼 꽉 맞물려 있어야 한다.”

볼거리가 많다고 해서 좋은 작품은 아니다. 주된 흐름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은 극의 흐름만 흩어놓을 뿐이다. “이야기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통일되게 움직여야 한다.” 티어노는 노래를 예로 들어 이 말을 쉽게 풀어준다. 악보가 복잡하다 해서 노래가 더 훌륭해지지는 않는다. “내 사랑이 떠나가네”라는 식의 단순한 후렴구가 되레 더 큰 감동을 주지 않던가. 플롯은 군더더기 없이 강렬해야 한다.

나아가, 주인공의 운명이 우연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주된 인물에게 왜 변화가 일어나는지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가장 훌륭한 발견은 개연성 있는 사건을 통해 뜻밖의 일이 벌어질 때에 일어난다.”

등장인물 또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은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한 사람이 자신의 실수 탓에 큰 불행에 빠질 때 사람들은 연민과 공포를 느낀단다. 왜 그럴까?

티어노는 이 말을 이렇게 풀어낸다. 터무니없는 악당이 망하는 모습은 후련함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울림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착해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꼭 착하게만 살지는 않는다. 삶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으며, 우리는 그 가운데서 고민한다. 우리 자신과 같은 처지인 주인공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하며 연민을 보낸다. 공포심 또한 똑같은 일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을 때 일어난다.

플롯이 튼튼하고 인물이 제대로 그려졌다면, 이제 화면으로 내용을 풀어낼 방법을 고민할 차례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그려낼 방법이 없다. 따라서 ‘주인공이 자동차를 좋아한다’보다, ‘주인공이 차를 너무 좋아해서 자동차를 훔치려 한다’라고 써야 한다.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달걀 4개를 풀어서 마신다. 주인공의 처지를 길게 설명할 때보다, 이런 동작 하나가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줄 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에서 사람이 아니라 행동을 다루라고 한 말은 이런 뜻이다.

사실 <시학>은 우리에게 그다지 별스러운 내용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이미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공식’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착한 주인공의 행복한 시절, 여기에 불현듯 찾아드는 불행, 찬찬히 밝혀지는 음모, 계속되는 위기일발의 상황과 통쾌한 해소에 이르기까지, 찬찬히 뜯어보면 영화 곳곳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러준 충고가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영화에서 이미 ‘상식’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시학>을 읽어야 할까? 무엇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넘고 싶은 그것부터 확실하게 짚어 보아야 한다.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지만 인간 삶은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사람들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갈등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겪다가 죽는다.

가족, 사랑, 우정, 성공 등의 주제는 인류에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제다. <시학>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일들을 가장 감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일러준다. 2500년의 세월로 검증받은 고전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영화는 이제 자동차나 철강만큼이나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호소력 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튼실한 기본기 위에서 나온다. <시학>을 새겨 읽어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상섭 옮김 
문학과지성사
<스토리텔링의 비밀>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아우라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이상섭 옮김 문학과지성사 <스토리텔링의 비밀>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아우라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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