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33.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부유한 노예의 역설
34. 손자와 클라우제비츠, 병법(兵法)의 대가들은 무엇이 다를까?
35. 명강의의 기술,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을 주려면
“평화는 군인의 무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의 말이다. 이 소리를 전해 들은 몽고메리 장군은 이렇게 대꾸했단다. “패튼의 위대함은 거기까지요. 패튼이 있기에 전쟁을 일으킨 적들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오. 그러나 나 몽고메리가 있는 한, 적들은 아예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할 거요.” 패튼과 몽고메리 가운데 누가 더 위대한 장군일까?
“최상의 승리는 적이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은 외교를 통해 적의 동맹관계를 끊어버려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이보다 못한 방법은 전쟁터에서 힘으로 적을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다. 최악은 적의 성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구절이다. 몽고메리의 말은 이 구절에 딱 어울린다.
<손자병법>을 좀더 읽어보자. “10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천리 밖의 전쟁터로 보낸다 해보자. 나라가 짊어져야 할 전쟁비용은 하루에 천금이 넘는다. 전쟁에 필요한 물건들을 나르는 백성들로 도로는 혼란스러워진다. 이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는 집이 70만 가호(家戶)에 이른다.” 전쟁을 왜 피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꼭 이겨야 할 테다.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은 ‘전쟁에서 예의를 차리는 짓은 멧돼지와 인의도덕을 따지는 것과 같다’고 잘라 말한다.
프로이센의 장군 클라우제비츠도 같은 생각이다. 열세 살 때부터 전투에 나갔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란 내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 행위이다.” 내 말을 듣게 하려면 무자비하게 상대를 짓밟아야 한다. 상대가 아예 싸울 능력을 잃어버리게끔 말이다. <손자병법>도 똑같은 충고를 던진다. “전쟁에서는 속이는 짓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兵不厭作)
그러나 전쟁은 뒷골목 건달들의 주먹다짐이 아니다. 옛 전쟁에서 성(城)을 무너뜨렸다 해보자. 승리한 병사들은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맘껏 분을 풀고 노략질을 한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뒷수습 또한 이긴 편의 몫이다. 분탕질을 당한 이들의 마음에는 원망과 미움이 가득할 테다. 이래서는 승리를 오롯이 지켜내기 힘들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목적은 상대를 짓밟는 데 있지 않다. 단지 내가 원하는 바를 손에 넣는 데 있을 뿐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전쟁도 남을 설득하는 기술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전쟁의 지휘관은 병사와 같아서는 안 된다. 병사들에게는 ‘육체적 용기’가 필요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과 맞붙어 싸우는 자세 말이다. 반면, 지휘관에게는 ‘정신적 용기’가 필요하다. 망신당했다고 곧장 칼을 뽑아 드는 모습은 지휘관답지 않다. 지휘관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정신적 용기란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태도를 말한다. 지휘관은 일어난 모든 일의 뒷마무리까지 머릿속에 넣고 움직여야 한다.
<손자병법>도 똑같은 충고를 던진다. 별 볼일 없는 건달들은 작은 용기, 소용(小勇)을 부릴 뿐이다. 욱하는 성질대로 행동할 뿐, 뒤에 어떤 일이 닥칠지 따져보지 않는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는 지휘관은 큰 용기, 대용(大勇)을 갖추어야 한다. 갑작스런 위기가 닥쳐도 놀라지 않으며, 까닭 없이 위협을 당해도 화내지 않아야 한다. 현명한 지휘관은 오직 이익이 있을 때만 전쟁을 벌인다. “국가에 이익이 있을 때만 싸움을 벌여라. 이익이 없는 다툼은 당장 그쳐야 한다.” 전쟁을 벌일 때는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는 신전(愼戰) 사상이다.
무한 경쟁 시대, 세상은 점점 전쟁터같이 되어 간다. 남을 이기지 못하면 금세 바닥으로 떨어져 버릴 테다. 전쟁할 때나 쓰던 ‘전략’, ‘전술’ 같은 말들도 이제는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손자병법>이나 클라우제비츠의 주장은 우리 삶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탈리아의 사상가였던 마키아벨리는 이런 생각에 고개를 흔든다. “병법을 일상생활에 끌어들인다면, 우리 삶은 지옥이 되어 버린다.” 왜 그럴까?
전쟁에서 이기려면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뛰어난 지휘관은 상대가 아쉬워하는 점에 칼을 꽂는다. 약한 나라는 친구 관계인 강한 나라가 등을 돌릴까 두려워한다. 여러 국가가 모인 연합군이라면 제각각 자기 나라가 얻을 이익에 민감한 법이다. 뛰어난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는 우두머리의 권위가 사라질까 전전긍긍한다. 뛰어난 전략가들은 상대의 약점을 족집게같이 집어낸다.
일상에서도 절실한 부분을 찾아내어 애태우는 사람은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재주 좋은 협상꾼들은 우리 마음을 붙잡고 흔들어대지 않던가. 그러나 삶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에서는 결국 최후의 승리란 없다. 힘이 떨어지고 지치면 또다른 경쟁자가 승리를 빼앗아 갈 테다. 정글에서 영원한 강자가 없듯이 말이다. 전쟁 같은 삶을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까닭이다.
윈스턴 처칠은 간디를 향해 ‘벌거벗은 거지 승려’라며 막말을 던졌다. 하지만 영국은 결국 간디를 이기지 못했다. 간디는 영국의 약점을 파고들지 않았다. 쏟아지는 주먹에 맞서려고 하지도 않았다. 묵묵히 얻어맞으며 사랑과 용서로 원수를 대할 뿐이었다. ‘상대를 공격하지 말고 부끄럽게 하라.’ 간디는 상대방의 인격에 호소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날로 전쟁터같이 되어가는 세상,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의 기술이 아니라 평화의 기술이 아닐까?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