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39. 붉은 악마는 종교가 될 수 있을까?-열정에게 종교를 묻는다면
40. 축구하는 호모 루덴스, 왜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할까?
41. 프랑켄슈타인과 한국 도깨비, 우리 안에 괴물 찾기 “빈민(貧民)에 의한 빈민의 스포츠.”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갖고 있는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축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긴, 축구는 좀 사는 이들에겐 마뜩지 않은 스포츠였다. 유명한 축구 클럽들은 노동자들의 축구 동아리에서 나왔다. 아스널은 런던에 있던 로열 아스널 탄약제조 공장 노동자들이 꾸린 축구팀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랭커셔&요크셔 철도회사 노동자들의 팀이었다. 마땅한 놀잇거리가 없던 시절, 주말이면 노동자들은 축구장으로 몰려들었다. 축구장 관람석은 의자 없이 층계로만 되어 있었다. 끼어 앉으면 관람객들이 얼마든지 많아도 되는 구도였다.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빽빽하게 모여 소리 지르는 상황, 폭력사태는 언제든 벌어질 수 있었다. 격렬한 경기는 곧잘 응원단끼리의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이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축구대회였지만 경기 모습은 아름답지 못했다. 배재구락부와 평양숭실구락부의 경기에서는 학생들끼리 패싸움까지 벌였다. 전통적인 라이벌 팀들 뒤에는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놓여 있기도 하다.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셀틱의 팬들은 각각 개신교와 가톨릭교도로 갈린다. 두 팀은 무려 150년 동안 ‘글래스고 더비’라는 라이벌 경기를 벌여왔다. AC 밀란과 인터 밀란이 벌이는 ‘밀라노 더비’는 또 어떤가. 1910년부터 두 팀은 파시즘 반대와 찬성, 좌익과 우익,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대표하는 팀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렇다면 축구는 갈등과 폭력을 부르는 나쁜 스포츠일까? 네덜란드 역사가 하위징아(호이징하)의 설명을 듣고 보면 꼭 그렇지 만은 않은 듯싶다. 그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놀이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상대방을 뒤에서 밀거나 발로 차서는 안 된다’, ‘골키퍼를 밀어서는 안 된다’ 등이다. 아무리 힘이 세고 상대가 밉더라도 주먹을 썼다간 바로 경기장 밖으로 쫓겨날 테다. 규칙을 무시해서는 게임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또한 놀이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진다. 권투에서는 링 안에서 장갑 낀 주먹으로 상대방을 쳐도 괜찮다. 그러나 링 밖에서 사람을 때리면 ‘폭력행위’가 될 뿐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대결은 경기장 안에서, 시합 시간만큼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 밖에서까지 상대에게 으르렁거렸다간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자면 전쟁도 놀이다. 전쟁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군인 아닌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며 포로를 괴롭혀서도 안 된다. 화학무기같이 금지된 살인도구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또한 싸움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터 아닌 곳에 아무 때나 쳐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놀이 규칙을 무시한 전쟁은 그냥 학살일 뿐이다. 학살에 대해 잘했다며 박수를 보낼 이들은 없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경기장 밖에서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내거나 상대 서포터들을 공격하는 짓거리는 행패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은 훌리건들 때문에 아예 국제 축구 경기에서 4년이나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래서 축구는 되레 평화를 이끄는 방법이 되곤 한다. 큰 다툼이 벌어질 일도 ‘게임의 규칙’으로 억눌러 서로를 해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첫 축구 시합은 1954년에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기에서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라”는 말을 던지기까지 했단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미움은 뿌리 깊었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는 앙숙끼리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1960년대, 미국은 중국과의 꽉 막힌 관계를 탁구 대결로 풀었다. 우리와 일본의 축구 경기도 그랬다. 경기를 하려면 무엇보다 상대방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폭력이 아닌 정해진 공격과 방어 기술을 써서 쌓인 갈등을 드러내고 푼다. 승리를 거두며 ‘복수’를 했다고 느끼면 상대를 향한 미움이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또다시 패배를 겪었다 해도 갈등이 풀리기는 마찬가지다. 실력을 길러 다음 시합에서 돌려주면 그만이다. 스포츠 경기를 자주 벌이는 나라들끼리는 끔찍한 폭력이 수그러드는 이유다.
축구는 경기 규칙이 아주 단순하다. 공을 차서 상대방 골대에 많이 넣는 쪽이 이긴다는 것만 알면 당장이라도 시합을 뛰어도 된다. 게다가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언제나 누구하고도 할 수 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축구는 세계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스포츠다. 겨울에 러시아에서는 검은색으로 축구장 라인을 그린단다. 경기장이 눈으로 덮여 있는 탓이다. 반면 무더운 브라질 같은 나라에서 축구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다. 사막이 많은 사우디나 이라크 또한 축구를 잘하는 나라로 꼽힌다.
축구는 나라와 문화 사이의 벽도 허문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배꼽 아래의 맨살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아랍 세계의 축구선수들도 반바지를 입는다. 이처럼 축구는 종교까지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축구의 엄격한 규칙은 세상 곳곳에 공통의 가치관과 질서를 심고 있는 셈이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풀 때는 원인과 결과를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이좋은 나라끼리는 축구 시합을 자주 벌인다. 하지만 나쁜 사이끼리도 축구 경기를 벌여보면 어떨까? 미국과 이란이 해마다 축구를 한다면? 서울 대 평양 축구대회가 부활한다면? 경기를 가졌으면 하는 나라 목록에는 끝이 없다. 아무쪼록 세상이 축구경기처럼 질서 있고 신사적이었으면 좋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난이도 수준-고2~고3] 39. 붉은 악마는 종교가 될 수 있을까?-열정에게 종교를 묻는다면
40. 축구하는 호모 루덴스, 왜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할까?
41. 프랑켄슈타인과 한국 도깨비, 우리 안에 괴물 찾기 “빈민(貧民)에 의한 빈민의 스포츠.”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갖고 있는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축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긴, 축구는 좀 사는 이들에겐 마뜩지 않은 스포츠였다. 유명한 축구 클럽들은 노동자들의 축구 동아리에서 나왔다. 아스널은 런던에 있던 로열 아스널 탄약제조 공장 노동자들이 꾸린 축구팀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랭커셔&요크셔 철도회사 노동자들의 팀이었다. 마땅한 놀잇거리가 없던 시절, 주말이면 노동자들은 축구장으로 몰려들었다. 축구장 관람석은 의자 없이 층계로만 되어 있었다. 끼어 앉으면 관람객들이 얼마든지 많아도 되는 구도였다.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빽빽하게 모여 소리 지르는 상황, 폭력사태는 언제든 벌어질 수 있었다. 격렬한 경기는 곧잘 응원단끼리의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이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축구대회였지만 경기 모습은 아름답지 못했다. 배재구락부와 평양숭실구락부의 경기에서는 학생들끼리 패싸움까지 벌였다. 전통적인 라이벌 팀들 뒤에는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놓여 있기도 하다.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셀틱의 팬들은 각각 개신교와 가톨릭교도로 갈린다. 두 팀은 무려 150년 동안 ‘글래스고 더비’라는 라이벌 경기를 벌여왔다. AC 밀란과 인터 밀란이 벌이는 ‘밀라노 더비’는 또 어떤가. 1910년부터 두 팀은 파시즘 반대와 찬성, 좌익과 우익,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를 대표하는 팀처럼 여겨지곤 했다.
<호모 루덴스> 요한 호이징하 지음, 김윤수 옮김, 까치글방
<축구의 문화사> 이은호 지음, 살림
<축구의 문화사> 이은호 지음,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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