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섬 78번지>
우리말 논술 8. 희망의 섬 78번지
중학진로독서 / [난이도 수준-중2~고1]
■ 이 책, 알고 보면 재미있다!
<희망의 섬 78번지>
우리 오를레브 지음 유혜경 옮김/비룡소 작가 1931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때 어머니, 동생과 함께 바르샤바 유태인(유대인) 게토 지역에서 숨어 지냈다. 어머니가 나치 독일군의 손에 목숨을 잃자 동생과 함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는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 안네가 죽어간 곳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로 이주해 1975년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1996년에 어린이책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받았다. <희망의 섬 78번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이다. 내용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폴란드의 유태인 거주 지역 게토에 12세 소년 알렉스가 홀로 남겨진다. 엄마는 행방불명되고 아빠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뒤 소식이 없다. 알렉스는 게토 78번지에 남아 있으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아빠의 말을 믿으며 78번지 건물 지하에 숨어 들어간다. 많은 유태인이 떠나거나 잡혀간 뒤 폐허가 되어버린 78번지는 아직도 지하 곳곳에 유태인들이 숨어 지내고 있고, 독일인들은 수시로 게토를 수색해 유태인들을 잡아간다. 알렉스는 독일군의 눈을 피해가며 게토 내 다른 빈집들을 뒤져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찾던 중 3층에 숨기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낸다. 그곳은 담장 너머 폴란드인 구역이 훤히 보이는 곳으로, 알렉스는 날마다 통풍구를 통해 폴란드인들의 생활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스는 78번지로 숨어든 유태인 반란군 두 명을 살리려다 독일 군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반란군 한 명이 죽어가자 그를 살리기 위해 비밀 통로를 통해 폴란드인 구역으로 넘어가 의사를 데려와 치료하고 돌봐준다.
얼마 후 반란군은 상처가 회복되어 떠나게 됐고, 폴란드인 의사는 어디론가 끌려간다. 반란 군인은 떠나면서 알렉스에게 꽤 많은 돈을 주고 가는데, 알렉스는 그 돈으로 더 자주 게토와 폴란드인 구역을 넘나든다. 비밀통로를 지나도록 허가해 주면서 돈을 받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그곳 식료품점에서 빵을 사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며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서로 맘이 통하는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스케이트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가 유태인 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됐다.
게토를 폴란드인들에게 개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알렉스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하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도 있었지만, 알렉스는 아빠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희망으로 게토를 떠나지 않는다. 결국 게토 안으로 폴란드인들이 들어오고 한겨울 폭설이 내려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위기를 맞던 어느 날, 알렉스는 지하 쪽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듣게 된다. 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바로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아빠였다. 알렉스는 그동안 겪은 모든 서러움과 두려움을 씻어 내리듯 아빠를 힘껏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 깊이 생각하기 이 소설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에서 스스로 사는 법을 배워 어른의 문턱에 한걸음 다가선 소년의 성장기이다. 주인공 알렉스에게 어느 날 ‘이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무서운 악몽이 현실로 닥쳤다. 실제로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때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렸다고 한다. 78번지의 담장 너머 폴란드인 구역은 게토와는 전혀 다른 딴 세상이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운동을 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쌍안경을 통해 마치 오페라를 관람하듯 그들의 일상을 구경하는 알렉스에게 게토는 무인도와 같다. 로빈슨 크루소가 살던 곳은 실제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었지만 게토는 겨우 담장 하나를 두고 갇혀버린 섬이었다. 작가는 왜 게토를 고립된 섬으로 표현하고 있을까? 게토는 인종차별이라는 그릇된 관념이 만들어 낸 부끄러운 흔적이다. 어떤 폴란드인들은 자신들도 나치에게 점령당해 고통을 당하는 처지이면서도 유태인들을 미워한다. 미움의 뿌리는 얼마나 질기고 무서운가. 나치의 지배 아래서 무려 600만 명이라는 유태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래선지 작가는 시오니즘을 옹호한다. 시오니즘은 전 세계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복귀시켜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운동이다. 알렉스의 엄마는 과거를 잊은 민족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말라 죽게 된다며 시오니즘을 지지한다. 반대로 아빠는 어디서 살든 피부가 무슨 색이든 무슨 이름으로 신을 부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시오니즘 운동은 2차대전 후 1948년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아랍지역에서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지금도 그곳은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숨을 내건 투쟁과 이를 저지하는 이스라엘 간의 충돌로 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은 2차대전 때 유태인들이 살았던 게토와 같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사이에 금 하나를 그어 놓고 매일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예전에 게토에 살던 유태인들처럼 폐허가 됐고, 어떤 집에서는 이스라엘 공격에 대비해 굴을 파 놓기도 한다. 이렇듯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결국 따뜻한 인간애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책 속에서 보루흐 할아버지는 알렉스를 도망치게 하려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무언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이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라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유태인 반란군을 살리려고 용감하게 게토 담장을 넘어가 의사를 데려온 알렉스, 위험을 무릅쓰고 게토로 넘어와 환자를 치료해 준 폴란드인 의사도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줬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고귀함을 잃지 않았기에 알렉스에게 게토 78번지는 희망의 섬이 된 것이다.
■ 책 속에 나 있다 ‘내 운명의 주인’은 ‘네 탓’이라 말하지 않는다 주도적인 삶의 자세란 문제가 던지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 “넌 네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운이 좋건 나쁘건 간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단다.” 앞의 말은 아빠가 알렉스에게 한 말이고, 뒤는 보루흐 할아버지가 한 말이다. 어떤 것이 맞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알렉스는 혹독한 시련 속으로 던져진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삶, 신세 한탄을 하고 핑계를 대거나 타인을 비난한다고 해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알렉스는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행운을 타고난 아이라고 생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아빠한테서 들었던 말과 배운 기술을 떠올리며 깊이 생각해 결정을 내린다. 게토를 넘어가 폴란드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온 뒤 은신처에 홀로 누웠을 때 잠시 그 애들을 부러워하며 슬퍼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바꾼다. 자신과 함께 건물 지하에 숨었다가 독일군들이 지하저장소를 폭발하는 바람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를 다른 아이들을 떠올리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다. 최소한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자신은 운이 그다지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했다. 그는 시련을 창조적으로 바꾸는 일이 우선이지만, 그것이 힘들면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번은 나치가 그의 소중한 원고를 불태워버렸다. 그때 그는 의기소침해지기는커녕 자신의 반응을 바꿨다. “왜 내가 당해야 하는가?” 하고 한탄하는 대신 “인생이 내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그가 찾은 대답은 “다시 써라. 더 잘 써봐라”였다. 주도적인 삶의 자세란 운명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네가 시켰잖아!”라든가 “너 때문이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인 동생이 있다고 하자. 장애인 동생을 돌보려면 시간을 쪼개야 하고, 때로 중요한 모임에도 빠져야 한다. 그럴 때 “왜 나한테 장애인 동생이 있는 거야”라고 불평하는 대신 기꺼이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 요즘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금 우리는 알렉스처럼 게토에 살거나 생존의 위험 속에 던져진 상황은 아니지만, 일상 안에서 헤쳐 나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불평하거나 남과 비교하기보다 그 문제가 자신에게 던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해결점을 찾는 게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일 것이다.
■ 나대로 책 읽기 “두렵단 말 대신 잘 해낼 것이란 생각 먼저” 철산중 2학년 황유림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무섭고 떨렸다. 마지막에 알렉스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를 만났을 때조차도 기쁨보다 불안이 앞섰다. ‘언제 독일군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야 될 텐데’ 하고 외치고 싶었다. 알렉스가 돈을 주고 게토 너머 폴란드인 구역으로 건너가서 그곳 아이들과 놀 때에도 혹시나 독일군에게 들켜서 잡혀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내가 알렉스가 된 것처럼 알렉스의 감정과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아빠와 함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던 중에 알렉스가 목숨을 걸고 도망을 친 장면이다. 알렉스는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등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지만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었다. 그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건물 지하 구멍 속으로 들어가 좁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며칠을 지내야 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책을 읽으면서 ‘만약 내가 이 책의 주인공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상상해보았다. 알렉스는 언제 붙잡혀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먹을 것을 찾아 해결하고 외로움을 견디며 살았다. 친구라고는 애완용 쥐 스노우뿐이었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알렉스처럼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친구도 이웃도 만날 수 없고,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폰 같은 통신 수단도 없이 혼자 지내야 한다는 건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마 알렉스도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지금의 나처럼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렉스는 살아냈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거나 힘들 것처럼 느껴질 때는, ‘두렵다’, ‘못하겠다’ 하는 생각보다 ‘할 수 있다’ ‘잘 해낼 것이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겠다. 그리고 어디서든지 알렉스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알렉스는 자기 처지도 어려우면서 자기 음식을 나눠주고, 부상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폴란드인 구역까지 넘어가 의사를 데려왔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남을 돕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정말 감동이다.
나는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아직 정하지는 못했다. 아이들을 돌봐주는 유치원 선생님도 되고 싶고, 또 훌륭한 성악가도 되고 싶다.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이 내 적성에 잘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악가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 노래이고,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알렉스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78번지 은신처 3층에 숨어 폴란드인 구역을 바라보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알렉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고, 내가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지금의 내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 것이다.
■ 내 꿈을 위해 한걸음 더
<다영이의 이슬람 여행>
정다영 지음/창작과비평사 <희망의 섬 78번지>에서 유태인 반란군 헨릭 아저씨는 유태인들이 발을 붙이고 살 나라가 없는 게 가장 문제라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꿈꾼다. 알렉스 역시 유태인들만 사는 도시가 있다면 집 밖으로 나가도 겁날 게 없고 길을 걷더라도 유태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유태인들은 그들의 바람대로 1948년에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 지역에 새로운 분쟁의 시작이었고, 수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감정이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지금도 자살폭탄 공격이나 총격전이 예사로 벌어지는 곳이다. <다영이의 이슬람 여행>의 첫 번째 여행지는 바로 분쟁의 현장, 팔레스타인 자치구이다. 9·11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던 2001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필자는 헤브론시의 한 팔레스타인 가정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지내면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처절한 모습과 비참한 생활환경, 그들의 뿌리 깊은 증오와 저항의 실체를 두 눈으로 목격한다. 하지만 정작 예루살렘의 유태인들은 신이 약속한 땅을 찾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유태인은 주변 아랍국 사람들을 쓰레기들이라고 욕한다. 2천년을 헤매고 방황하며 서러움을 겪었던 유태인들이 이제 다른 민족을 멸시하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매운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더 혹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옛말을 떠올린다.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난민들을 돕고 있는 미국인들의 비정부기구가 있으며, 세계 인권기구들, 이스라엘인이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반대하는 단체들도 있다. 여성들이 착용하는 베일에 대한 이 책의 시각은 흥미롭다. 서구에서는 이슬람 여성이 착용하는 차도르와 부르카 등을 여성차별과 속박의 대명사로 인식해 인권 탄압이라 하지만, 이슬람 여성들 중에는 차도르를 씀으로써 눈에 보이는 육체가 아니라 내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니 성형수술을 하며 몸매 가꾸기에 온갖 정성을 쏟는 서구식 생활방식을 ‘성의 상품화’가 아니냐고 꼬집는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고 찾아간 터키의 트로이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온 트로이 전쟁이 진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일 거라고 믿고 트로이를 찾아 발굴을 시작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 7년에 걸친 발굴 작업 끝에 트로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트로이의 파괴자이다. 고고학적 지식이 없었던 그가 도시를 마구 파헤쳐놓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여행해 본 이슬람 세계는 교과서에서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세계사 시간에 교과서 옆에 이 책을 놓고 함께 보면 유익하겠다.
우리 오를레브 지음 유혜경 옮김/비룡소 작가 1931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때 어머니, 동생과 함께 바르샤바 유태인(유대인) 게토 지역에서 숨어 지냈다. 어머니가 나치 독일군의 손에 목숨을 잃자 동생과 함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는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 안네가 죽어간 곳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로 이주해 1975년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1996년에 어린이책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받았다. <희망의 섬 78번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이다. 내용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폴란드의 유태인 거주 지역 게토에 12세 소년 알렉스가 홀로 남겨진다. 엄마는 행방불명되고 아빠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뒤 소식이 없다. 알렉스는 게토 78번지에 남아 있으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아빠의 말을 믿으며 78번지 건물 지하에 숨어 들어간다. 많은 유태인이 떠나거나 잡혀간 뒤 폐허가 되어버린 78번지는 아직도 지하 곳곳에 유태인들이 숨어 지내고 있고, 독일인들은 수시로 게토를 수색해 유태인들을 잡아간다. 알렉스는 독일군의 눈을 피해가며 게토 내 다른 빈집들을 뒤져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찾던 중 3층에 숨기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낸다. 그곳은 담장 너머 폴란드인 구역이 훤히 보이는 곳으로, 알렉스는 날마다 통풍구를 통해 폴란드인들의 생활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렉스는 78번지로 숨어든 유태인 반란군 두 명을 살리려다 독일 군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반란군 한 명이 죽어가자 그를 살리기 위해 비밀 통로를 통해 폴란드인 구역으로 넘어가 의사를 데려와 치료하고 돌봐준다.
인종차별 ‘지옥’에서 인류애 꽃피운 용기
■ 깊이 생각하기 이 소설은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에서 스스로 사는 법을 배워 어른의 문턱에 한걸음 다가선 소년의 성장기이다. 주인공 알렉스에게 어느 날 ‘이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무서운 악몽이 현실로 닥쳤다. 실제로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때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렸다고 한다. 78번지의 담장 너머 폴란드인 구역은 게토와는 전혀 다른 딴 세상이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운동을 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쌍안경을 통해 마치 오페라를 관람하듯 그들의 일상을 구경하는 알렉스에게 게토는 무인도와 같다. 로빈슨 크루소가 살던 곳은 실제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었지만 게토는 겨우 담장 하나를 두고 갇혀버린 섬이었다. 작가는 왜 게토를 고립된 섬으로 표현하고 있을까? 게토는 인종차별이라는 그릇된 관념이 만들어 낸 부끄러운 흔적이다. 어떤 폴란드인들은 자신들도 나치에게 점령당해 고통을 당하는 처지이면서도 유태인들을 미워한다. 미움의 뿌리는 얼마나 질기고 무서운가. 나치의 지배 아래서 무려 600만 명이라는 유태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래선지 작가는 시오니즘을 옹호한다. 시오니즘은 전 세계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복귀시켜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운동이다. 알렉스의 엄마는 과거를 잊은 민족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말라 죽게 된다며 시오니즘을 지지한다. 반대로 아빠는 어디서 살든 피부가 무슨 색이든 무슨 이름으로 신을 부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시오니즘 운동은 2차대전 후 1948년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아랍지역에서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지금도 그곳은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숨을 내건 투쟁과 이를 저지하는 이스라엘 간의 충돌로 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은 2차대전 때 유태인들이 살았던 게토와 같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사이에 금 하나를 그어 놓고 매일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예전에 게토에 살던 유태인들처럼 폐허가 됐고, 어떤 집에서는 이스라엘 공격에 대비해 굴을 파 놓기도 한다. 이렇듯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결국 따뜻한 인간애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책 속에서 보루흐 할아버지는 알렉스를 도망치게 하려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무언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이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라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유태인 반란군을 살리려고 용감하게 게토 담장을 넘어가 의사를 데려온 알렉스, 위험을 무릅쓰고 게토로 넘어와 환자를 치료해 준 폴란드인 의사도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줬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고귀함을 잃지 않았기에 알렉스에게 게토 78번지는 희망의 섬이 된 것이다.
■ 책 속에 나 있다 ‘내 운명의 주인’은 ‘네 탓’이라 말하지 않는다 주도적인 삶의 자세란 문제가 던지는 의미를 생각하는 것 “넌 네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어.” “운이 좋건 나쁘건 간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단다.” 앞의 말은 아빠가 알렉스에게 한 말이고, 뒤는 보루흐 할아버지가 한 말이다. 어떤 것이 맞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알렉스는 혹독한 시련 속으로 던져진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삶, 신세 한탄을 하고 핑계를 대거나 타인을 비난한다고 해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알렉스는 자기에게 벌어진 일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행운을 타고난 아이라고 생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아빠한테서 들었던 말과 배운 기술을 떠올리며 깊이 생각해 결정을 내린다. 게토를 넘어가 폴란드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온 뒤 은신처에 홀로 누웠을 때 잠시 그 애들을 부러워하며 슬퍼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바꾼다. 자신과 함께 건물 지하에 숨었다가 독일군들이 지하저장소를 폭발하는 바람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를 다른 아이들을 떠올리면 더 이상 불평할 수 없다. 최소한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자신은 운이 그다지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했다. 그는 시련을 창조적으로 바꾸는 일이 우선이지만, 그것이 힘들면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번은 나치가 그의 소중한 원고를 불태워버렸다. 그때 그는 의기소침해지기는커녕 자신의 반응을 바꿨다. “왜 내가 당해야 하는가?” 하고 한탄하는 대신 “인생이 내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그가 찾은 대답은 “다시 써라. 더 잘 써봐라”였다. 주도적인 삶의 자세란 운명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나보고 그렇게 하라며? 네가 시켰잖아!”라든가 “너 때문이야!”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인 동생이 있다고 하자. 장애인 동생을 돌보려면 시간을 쪼개야 하고, 때로 중요한 모임에도 빠져야 한다. 그럴 때 “왜 나한테 장애인 동생이 있는 거야”라고 불평하는 대신 기꺼이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 요즘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금 우리는 알렉스처럼 게토에 살거나 생존의 위험 속에 던져진 상황은 아니지만, 일상 안에서 헤쳐 나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불평하거나 남과 비교하기보다 그 문제가 자신에게 던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해결점을 찾는 게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일 것이다.
■ 나대로 책 읽기 “두렵단 말 대신 잘 해낼 것이란 생각 먼저” 철산중 2학년 황유림
황유림양
■ 내 꿈을 위해 한걸음 더
<다영이의 이슬람 여행>
정다영 지음/창작과비평사 <희망의 섬 78번지>에서 유태인 반란군 헨릭 아저씨는 유태인들이 발을 붙이고 살 나라가 없는 게 가장 문제라면서 이스라엘 건국을 꿈꾼다. 알렉스 역시 유태인들만 사는 도시가 있다면 집 밖으로 나가도 겁날 게 없고 길을 걷더라도 유태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유태인들은 그들의 바람대로 1948년에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 지역에 새로운 분쟁의 시작이었고, 수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감정이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지금도 자살폭탄 공격이나 총격전이 예사로 벌어지는 곳이다. <다영이의 이슬람 여행>의 첫 번째 여행지는 바로 분쟁의 현장, 팔레스타인 자치구이다. 9·11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던 2001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필자는 헤브론시의 한 팔레스타인 가정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지내면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처절한 모습과 비참한 생활환경, 그들의 뿌리 깊은 증오와 저항의 실체를 두 눈으로 목격한다. 하지만 정작 예루살렘의 유태인들은 신이 약속한 땅을 찾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유태인은 주변 아랍국 사람들을 쓰레기들이라고 욕한다. 2천년을 헤매고 방황하며 서러움을 겪었던 유태인들이 이제 다른 민족을 멸시하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매운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더 혹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옛말을 떠올린다.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난민들을 돕고 있는 미국인들의 비정부기구가 있으며, 세계 인권기구들, 이스라엘인이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반대하는 단체들도 있다. 여성들이 착용하는 베일에 대한 이 책의 시각은 흥미롭다. 서구에서는 이슬람 여성이 착용하는 차도르와 부르카 등을 여성차별과 속박의 대명사로 인식해 인권 탄압이라 하지만, 이슬람 여성들 중에는 차도르를 씀으로써 눈에 보이는 육체가 아니라 내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니 성형수술을 하며 몸매 가꾸기에 온갖 정성을 쏟는 서구식 생활방식을 ‘성의 상품화’가 아니냐고 꼬집는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신화를 떠올리고 찾아간 터키의 트로이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온 트로이 전쟁이 진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일 거라고 믿고 트로이를 찾아 발굴을 시작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 7년에 걸친 발굴 작업 끝에 트로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트로이의 파괴자이다. 고고학적 지식이 없었던 그가 도시를 마구 파헤쳐놓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여행해 본 이슬람 세계는 교과서에서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세계사 시간에 교과서 옆에 이 책을 놓고 함께 보면 유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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