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무렵 전북 이리(익산)에서 해방을 맞은 필자에게 이리역 광장에 쓰러지듯 모여 있던 패전국 일본 군인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필자가 엿을 팔러 다니기도 했던 이리역의 1910년대 건립 초창기 전경.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942년 전북 이리(익산)로 이사하던 6살 무렵부터 나는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갑인 사촌누나와 조카딸 두명 등 넷이 함께 글을 배웠는데, 나만 늘 조는 바람에 거의 익히지 못했다. 언젠가 아버지는 졸기만 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푹 쉬셨는데 그 모습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래도 아들이라고 기대를 걸었는데 딸들보다 부실하다고 여겨져 실망을 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무렵 내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동네의 일고여덟살 또래들이 소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바로 옆집 동무인 충희와 광열이도 학교에 들어가 ‘이치 니 산’을 외우고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같은 말을 떠들고 다녔으나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동무들이 교복을 입고 자랑스레 돌아다니며 일본말로 떠드는 모습을 볼 때면 부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생각은 내가 가출할 때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열등감에 젖게 했다. 아버지는 나만이 아니라 형제나 조카를 가리지 않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일본놈’이 된다면서.
아무튼 나는 해방될 무렵까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들판과 뒷동산을 돌아다니면서 공놀이·씨름 따위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논바닥에서 메뚜기도 잡아 구워 먹고, 남의 밭에서 몰래 보리도 털어 구워 먹고 참외도 서리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이리 시장에 나들이도 가끔 했다. 그런 어느날인가 어머니가 사준 ‘아이스케키’(막대 아이스크림)를 빨면서 일본인 집 앞을 지나고 있는데 2층에서 내려다보던 내 또래의 일본인 아이가 달려 내려오더니 내 멱살을 잡고 욕을 해댔다. 나는 겨우 뿌리치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봉변이었다. 잘못이라고는 부러워 쳐다본 것밖에 없는데 멱살까지 잡히고 욕까지 얻어먹었으니 말이다.
그 무렵 마을 골목에서는 아이들 사이에 ‘이승만이 흰옷을 입으라고 라디오에서 연설을 했다’, ‘김일성은 일본 육사를 나왔지만 사진 한 장 안 찍었다’, ‘우리 독립군들이 곧 쳐들어온다’ 등등등 가닥없는 얘기들이 돌아다녔다. B-29 전투기가 높은 하늘에서 꼬리에 구름을 달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곧 해방될 것이란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 형님 두 분은 이리역 앞에서 사과 장사를 하고 형수들은 몸뻬를 입고 모내기를 해주며 열심히 살았다. 특히 해방이 된 뒤에는 사과 장사가 잘돼 형편이 많이 나아진 덕분에 동네에서 중간 이상 가는 집을 마련하고 논도 몇 마지기 부칠 수 있었다. 또 어머니는 밀주를 빚어 짚더미에 묻어 두고 밀대(밀정의 남도 사투리)의 눈을 피해 가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었다.
마침내 45년 8월 해방된 직후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이리역 지하굴의 바깥 동네인 송학동의 일본인 농장 관련 일이다. 그 일본인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네 청년들이 모여 농장을 습격하자고 모의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다행히 일본인들이 낌새를 알고 먼저 도주해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또 하나는 이리역 광장에서 본 일본군들의 모습이다. 일본군 수백명이 역 앞 광장에 짐을 풀어놓은 채 초라한 행색으로 드러누워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애의 눈으로 보아도 그들은 힘이 빠져 있었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저들은 어디로 가나, 왜 저렇게 누워 있나 따위가 궁금했다. 형님들은 그런 내게 ‘그놈들을 보지도 말고 가깝게 가지도 말라’는 엄한 주의를 내렸다.
이 무렵 우리 집에는 큰 환란이 밀어닥쳤다. 아버지만 빼고 모든 식구가 장질부사(장티푸스)에 전염된 것이다. 사촌형과 조카는 끝내 죽고 말았다. 허약 체질인 나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나아갈 무렵 나는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며 한글을 읽었다. 마침 한글로 된 신문지를 천장에 발랐던 것이다. 그 한 대목에 ‘이종철 새틈맞이 무대’라 쓰여 있었는데 그 뜻을 전혀 알아먹을 수 없었다. 그 뒤에도 늘 이 구절을 외고 있었는데 한참 훗날 학교에 다니면서 교우지 교정을 보다가 ‘새틈’은 ‘새봄’의 오식, 이종철은 코미디언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나는 열 살이 넘어서면서 잔병치레도 줄어들고 한자와 한자책에 달린 토를 보며 한글을 저절로 깨치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총명하다는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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