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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자기야, 내가 누구~게?

등록 2010-10-25 09:24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함께하는 교육] 우리말 논술 /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26
[난이도 수준-중2~고1]

“커서 뭐 하니?”

노트북을 켜고 혼자 중얼거린다. 화가가 되겠다고? 선생님이 되겠다고? 커서 뭐 할 거냐고 묻지 않았다. 혼자 깜빡깜빡 조는 한글프로그램 화면 속의 커서(cursor)에게 말을 걸었다. 커서는 외로워 보인다. 그걸 바라보는 나도 외롭다. 커서도 나를 가만히 응시한다. 안쓰러운 눈길로 이렇게 물어볼 것만 같다. “안 쓰고 뭐 하니?”

커서에 불을 붙여야 한다. 아무 글자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 이 황량하고 적막한 광야를 가득 채워야 한다. 아이 참, 불이 붙으려다 자꾸만 꺼진다. 애가 탄다. 뭐라고 써야 활활 타오를까. 내딛는 첫발은, 힘겹다. ‘첫 문장’ 이야기다.

“난 고민 안 해.” 초딩 은서는 당당하게 말한다. 첫 문장의 의미를 묻자 “그게 먹는 거냐?”는 반응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와 만화는 많다.”(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글을 잘 쓰려면 수준이 높은 책을 읽어야 한다.”(글을 잘 쓰려면), “우리 동네에는 재미있는 간판이 많다.”(간판에 대하여), “난센스 퀴즈는 그냥 퀴즈가 아니다.”(난센스 퀴즈), “우리 학교는 7월21일이 방학이다.”(방학을 맞는 나의 자세)

백발백중(!)이다. 은서가 내뱉는 최초의 문장엔, 주제에 포함된 낱말이 100% 섞였다. 만화가에 관한 글에선 ‘만화가’가 반드시 나온다. 날라리에 관해 쓸 땐 ‘날라리’가, 난센스 퀴즈를 말할 땐 ‘난센스 퀴즈’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단순함의 극치!

준석도 50%는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절반은 의뭉스럽다. “문제를 내겠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보기 싫든 보고 싶든 볼 수밖에 없는 것은?”(간판에 대하여), “이 글을 보면 아마 여러분들이 돌을 던지게 될 것이다.”(난센스퀴즈), “내가 어른도 아닌데 이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돈 없으면 못 산다) 살짝 구미를 당기게 한다. 나쁘지 않다.


아이들이 수박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녹색 줄무늬 껍질을 깨뜨리면 빨간 속살이 드러난다. 겉까지 빨갈 필요는 없다. 글을 쓰면서 껍질이 하얗거나 시커먼 수박 품종을 재배하면 안 될까? ‘예측불허’한 폼으로 글의 대문을 열자는 말이다. 뻔하디뻔한 첫마디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 태도는 창의적인 글쓰기를 위해 중요한 사항이다. 예를 들어 통일에 관한 글의 서두가 이렇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금강산을 다녀온 소감문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으로 시작한다면 어떠한가. 독자들은 이들을 ‘그깟 첫 문장’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이 글을 쓰다 잠시 딴짓을 했다. 머리를 식히려 회사 음료자판기 앞으로 갔다. 동전을 넣으려는데 자판기 위의 그림이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젊은 여인이 연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두 눈을 손으로 가리며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갑자기 어떤 음성이 환청처럼 귓가에 울릴 듯하다. ‘자기야, 내가 누구~게?’

첫 문장이 ‘내가 누구~게’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설렘’을 안겨주는 출발. 눈이 감기고 상상력이 발동하도록 말이다.

다시 초딩 은서의 글로 돌아가 보자. 장난전화에 관해 쓴 최신 글이다. “따르릉- 따르릉-.”

오우! ‘장난전화’라는 낱말이 처음부터 안 들어갔네. 칭찬을 해줘야 할까? 구박을 하고 말았다. “자전거 벨 소리냐? 요즘 ‘따르릉’거리는 전화기가 어딨어?” “있어, 있다니까~.” “됐고. 다시 써!” “히잉~.”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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