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부산 보수동으로 피란 온 한영중학교의 판잣집 교사 앞에서 1953년 재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필자가 이 무렵 두어달 남짓 다녔던 곳으로 졸업은 못했지만 생애 첫 모교로 여긴다.
한영고총동창회 제공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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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서울애린원에서 1년쯤을 지낸 1953년 봄 고대하던 입학기가 되었다. 장아무개 원장이 우리 또래 아이들 10여명을 앉혀 놓고 시험을 보였는데 내가 달달 외고 있는 <지능고사>를 들고 있었다. 그 책은 각 중학교 입시에 나온 문제를 모은 것이었다. 원장이 책을 뒤지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는 입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했다. 당시에는 입학시험 문제가 학교마다 달랐다. 나를 포함해 3명만이 중학교 입시를 허락받았다. 여기서 떨어진 아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망했다. 그러면 왜 3명만 허락을 받았는가? 고아원에서 일을 시켜 먹으려고 일부러 안 보낸 것이다. 적령기에 드는 아이들은 고아원 규정에 따라 당연히 모두 입학시험을 보여야 했는데도 말이다.
이를테면 비가 오는 날이면 오줌똥을 퍼서 개울로 내려보내는 일도 아이들 몫이었다. 고아원 아래 있던 영선국민학교에는 하필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냄새가 진동하면 부대에서 사람을 보내 항의했으나 고아원에서는 달리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무시한 채 계속 버렸다.
어느날 나는 화장실에 가서 판자에 왼손으로 연필로 ‘모든 아이에게 학교 시험을 보여라’거나 ‘일만 시키지 말고 공부를 시켜라’ 따위의 글씨를 써놓았다. 원장 아들이 이를 보고 입학 적령기 아이들을 천막 안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글씨를 쓰게 하고 살펴보았다. 나도 글씨를 써 보였으나 입학시험을 허락받은 처지여서 대충 대조했다. 대신 다른 아이들이 얻어맞기도 하면서 심하게 시달렸으나 범인이 잡힐 리가 없었다. 나는 심한 양심의 갈등을 겪었으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어쨌든 나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불거졌다. 모두 야간학교에 가라는 것이었다. 김윤직 형이 ‘너 정도면 경기중학도 들어갈 수 있으니 원장에게 졸라보라’고 일러주었으나 어림없는 말이었다. 일반 중학교에 들어가면 약간이라도 돈을 내야 했지만 야간학교에서는 전액 면제받았기 때문이다. 또 낮에는 일을 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보수동공원에 자리잡은 한영중학교에 합격했다. 서울에서 피란 내려온 학교로 중·고 통합과정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내 입학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판자로 지은 학교는 하필 공원 비탈에 있어서 비만 오면 등굣길이 미끄러워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때 교장은 박은식 선생이었고 담임은 수학을 가르치는 조민희 선생이었는데 고아라서인지 나를 잘 돌봐주었다. 지금도 한영중학에 그 시절 내 성적표나 신상 기록이 남아 있는지 가끔 궁금하다.
두어달쯤 학교에 재미를 붙였을 때였다. 원장 아들의 횡포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고아원을 지으라고 보내준 목재로 그는 고아원 뒤에 터를 닦아 작은 방을 들이더니 여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해롱거리기까지 했다.
그 무렵 어머니도 내 소식을 듣고는 가끔 찾아왔다. 어머니는 충남 부여에서 부산 초량동으로 옮겨와서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참기름 장사를 했다. 가끔 먹을거리를 들고 나를 불러냈다. 나는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날까봐 신경도 쓰였지만 어머니가 찾아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아무튼 나는 어느날 불만 많은 아이들 몇몇을 꼬여서 밤을 틈타 몽둥이 한 개씩을 꼬나들고 원장 아들을 습격했다. 말로 이러쿵저러쿵할 것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고 나서 각본대로 각자 튀었다. 나는 부두로 내달렸다. 배표 살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느 할머니가 짐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은근히 다가가서 할머니에게 말을 다정스레 걸면서 짐을 들어드렸다. 배표를 받는 사람 앞에 서서 나는 조금 길게 할머니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 잘 가세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배가 떠나려고 고동소리를 낸 순간 나는 다시 헐레벌떡 뛰어가서 표 받는 사람에게 책 보따리를 흔들어 보이면서 그 할머니에게 급하게 전달할 물건이 있다고 사정을 했다. 그는 빨리 전하고 오라며 보내줬고 나는 배에 오르자마자 밑바닥으로 숨어버렸다. 배는 마산행이었다.
마산시청 옆에 있는 고아원을 찾아갔으나 ‘불량소년’이라며 한사코 받아주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마산시청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한 여군 장교가 지나가다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 곳이 없다’고 하자 그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간호장교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밥을 실컷 얻어먹고 한방에 잠을 재워주었다. 아침에 밥상을 놓고 그의 어머니는 ‘주여, 이 아이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올렸다. 모녀가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기에 나는 여수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훗날 두 분의 은혜를 갚으려고 <한국일보>에 칼럼을 쓴 적이 있었으나 지금껏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역사학자
아무튼 나는 어느날 불만 많은 아이들 몇몇을 꼬여서 밤을 틈타 몽둥이 한 개씩을 꼬나들고 원장 아들을 습격했다. 말로 이러쿵저러쿵할 것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고 나서 각본대로 각자 튀었다. 나는 부두로 내달렸다. 배표 살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느 할머니가 짐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은근히 다가가서 할머니에게 말을 다정스레 걸면서 짐을 들어드렸다. 배표를 받는 사람 앞에 서서 나는 조금 길게 할머니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 잘 가세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배가 떠나려고 고동소리를 낸 순간 나는 다시 헐레벌떡 뛰어가서 표 받는 사람에게 책 보따리를 흔들어 보이면서 그 할머니에게 급하게 전달할 물건이 있다고 사정을 했다. 그는 빨리 전하고 오라며 보내줬고 나는 배에 오르자마자 밑바닥으로 숨어버렸다. 배는 마산행이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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