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부터 역사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역사기행과 한문강좌를 이끌던 필자는 수강생들 사이에 주례로도 인기가 높았다. 사진은 90년대 중반 역사강좌로 인연을 맺은 건축가 허재봉씨 부부의 이색 결혼식 장면.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5
역사문제연구소에서도 나는 한문강좌를 맡았다. 청강생은 앞서 모인 민중사 세미나팀이 중심이 되었고 연구원들도 참가했는데 대부분 소장학자로 정치학·역사학·국문학 전공자들이었다. 삼남농민봉기의 원인이 된 ‘삼정책’(강위의 글)이나 황현의 <매천야록> 등을 교재로 삼았다. 중국의 경서 대신 우리 역사 사료를 읽도록 한 것이다.
필동의 한문강좌에는 김종익(국민은행 지점장)·이흥재(서울 법대 교수)·이철(회사원) 등 외부 인사도 드나들었고 역문연 연구원인 한상구·윤해동·김경자와 후지나가 다케시(훗날 오사카산업대학 교수) 등도 참석했다. 이때에도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 19세기 후반의 역사를 실은 사료를 강의 교재로 삼았다. 물론 강의가 끝나면 연구소 아래에 있는 베를린호프집에 가서 2차 담소 자리가 마련되었다. 내가 받은 약간의 사례비는 이런 자리에서 다 털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남아 있다. 한문강좌 수강생들과 맺은 끈끈한 인간적 유대를 잊을 수 없다. 이들 중에서 몇 사람은 나를 슬프게 했다. 우윤은 내가 동학농민전쟁 관련 사업을 펼칠 적에 실무를 도맡아 보았으며 이균영은 역문연 발족 때부터 열성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수강료 대신 그림만 주곤 했던 화가 김점선도 근래에 죽어 나를 슬프게 했다.
또 이들이 결혼할 때 자주 주례를 서주었는데 우윤, 임대식과 김정연, 윤해동, 이승렬과 서현주, 한상구와 조경란 등 소장 연구자들이었다. 한문 제자인 이희주는 꾸준하게 참석하면서 홍기훈(광주 민권변호사 홍남순의 아들)과 결혼했다. 연구소 간사인 김경자와 후지나가가 국제결혼을 할 때에도 내가 주례를 보았다. 역문연 연구원들의 주례는 일일이 꼽을 수 없다.
주례는 하나의 통과의례라지만 서로 교감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주례사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신부 아버지가 신부를 인도해 신랑에게 인계하지 않고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게 하였고, 신랑 신부를 소개하면서 명문 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집안에서 훈육을 받았다든지, 돈을 많이 벌라고 당부한다든지 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부부가 모두 연구자일 때는 남편이 같이 우유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주라는 등 함께 아이를 키우라고도 했고, 아내가 전업주부일 때는 남편의 술시중도 적당하게 들어주라고 당부했다. 서울 성동구민회관에서 열린 김경자의 결혼식에서는, 예식장의 여직원이 내 주례사를 듣고 처음으로 감동적이고 실질적인 주례사를 들었다며 자신의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다. 주례사도 인생관이 반영되어야 하고 신랑 신부가 동등한 조건에서 가정생활을 꾸려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덕분인지 나는 주례로서 인기를 누렸다.
이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여자아이에게 숙(淑)이나 정(貞), 남자아이에게 웅(雄)이니 철(鐵)을 붙이지 않고 대체로 중성으로 지어줬다. 왜 여자만 정숙해야 하고 왜 남자만 씩씩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단 것이다. 그래서 이름만 보고는 남녀가 잘 구분되지 않게 한 것이다. 이름부터 양성평등을 실현하려는 의도이다. 이런 이름이 집안이나 학교에서 자주 화제에 오르는 모양이다.
이름 얘기를 하나 더 해보자. 이런저런 자리에서 자주 만난 조한혜정 교수는 새 여성운동을 표방한 모임인 <또하나의 문화>를 끈질기게 꾸려왔다. 내가 연세대에서 벌인 그들 모임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 전통시대 남녀평등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남성 중심의 성을 갖는 문제점을 설명하고서 성명을 통한 평등 문제를 거론했다. 이 말에 힌트를 얻었는지 그 뒤 부모의 성을 나란히 적는 운동을 벌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 아이들도 이 모임에서 방학 때마다 벌이는 캠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는데, 중학교 때 딸 응소가 아버지 어머니 성을 함께 쓴 ‘이김’(李金)의 명찰을 달고 교정에 돌아다녀서 교사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들 연구원이나 한문 제자들과 지금도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다. 함께 모이면 결코 권위적이거나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라 흉허물 없이 떠들어댄다. 세월이 지나도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동지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나는 누구보다도 이들 연구원이나 한문 제자들과 지금도 끈끈한 정을 나누고 있다. 함께 모이면 결코 권위적이거나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라 흉허물 없이 떠들어댄다. 세월이 지나도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아 동지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