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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금남로서 본 광주…희생 아픔 나누는 ‘시민공동체’ / 정해숙

등록 2011-06-16 19:57

1980년 5월21일부터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을 몰아내고 ‘해방 공동체’를 이뤘다.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전남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누구나 자유롭게 분수대 단상에 올라 ‘자유와 민주’를 노래했다. 필자도 당시 현장에서 함께했다.  <오월광주> 중에서
1980년 5월21일부터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을 몰아내고 ‘해방 공동체’를 이뤘다.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전남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누구나 자유롭게 분수대 단상에 올라 ‘자유와 민주’를 노래했다. 필자도 당시 현장에서 함께했다. <오월광주> 중에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24
1980년 5월19일 밤부터 광주시내에는 전기가 끊겼다. 공수부대의 무차별한 가택수색과 연행을 피해 목포 사촌이모네로 가겠다는 두 아들을 설득하는 동안 아파트 밖에서 주민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두 손을 입에 모아 손마이크를 만들어 외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다 나오세요. 우리가 아파트를 지킵시다. 각목이든 뭐든 집에 있는 대로 들고 정문 앞으로 나오세요. 젊은이들 빨리 나오세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치며 아파트단지를 돌고 있었다. “저 봐라. 여기를 사수하자는 것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이 빠져나가면 되겠느냐. 아직 여기 빠져나간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당하더라도 같이 당하자. 여기 있어.” 그 소리를 듣고 아들들은 결국 주저앉기로 했다. 하지만 ‘저 가방들은 방으로 가져다 두라’는 내 말에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직은 가야 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눈치들이었다. 밖은 점점 더 캄캄해지고 웅성거림과 함께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을 지켜야 됩니다’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제야 두 아들은 가방을 안에 들여놓고 눌러앉았다.

그 저녁 어둠 속에서 나는 두 아들을 앉혀놓고 박정희 군부독재가 이어져온 과정과 10·26 쿠데타 등 우리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우리 세 모자와 아파트 주민들은 그 밤을 무사히 넘겼다.

20일부터는 전화도 끊겼지만 사람들 입을 통해 광주 시내와 외곽 곳곳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는 처참한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화정동 어디 고갯길에서는 시민군을 잡으려다 군인들끼리 총 쏴서 죽었다’라든가 ‘화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는 경찰들이 지나가는 시민들을 트럭에 수없이 싣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등등의 흉흉한 소식들도 들려왔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젊은이들은 무조건 트럭에 실려가 죽거나 자취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아들을 붙들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엄마의 순간적인 직감으로 단호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혼자 두고두고 드는 생각이다.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5·18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의 구타와 학살에 대항한 전남대에서부터 촉발됐다. 18일 일요일인데도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는 공수부대에 점령당한 학교 상황에 분노한 학생 200여명이 모여 있었다. 계엄군과 대치하던 학생들은 “계엄군은 물러가라” “휴교령을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이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해 갔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시위대를 형성해 ‘구속자 석방’ ‘계엄령 해제’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공수부대들이 저돌적으로 돌진하며 무차별 폭행과 구타, 가혹행위를 저질러 학생들은 초주검이 되어갔다. 이에 분노를 느낀 광주시민들이 동조했고,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을 지나 금남로에 이르면서 시민들 규모가 급증했다. 시민들은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엄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정의로운 항쟁을 벌인 것이다.

그날 이후 시민들은 날마다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 모여들었다. 부처님오신날이었던 21일 “금남로가 완전히 해방의 도시가 되었으니 와보라”는 이경희 선생의 연락을 받고 나도 월산동 집을 나와 도청까지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서 갔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고, 양동시장 아주머니들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주먹밥과 김밥, 빵, 음료수 등을 나눠주었다. 주검이 실린 손수레가 금남로에 들어서자 시민들의 분노는 한층 치솟았고, 공수부대의 최루탄과 총탄 난사로 수십명이 또 쓰러졌다. 도청 바로 앞 상무관에는 주검이 안치된 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광주는 전쟁터에 버금가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은 누구랄 것 없이 수시로 상황 보고를 하면서 광주의 아픔을 나누고 사태 수습 방안을 찾았다. 어쩌다 외곽에서 쏘는 공포 소리가 들리거나 총을 쏠 때면 순간 도청 근처 골목으로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도청 앞 분수대는 ‘시민공동체의 무대’였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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