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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섬’ 광주…참상 기록 노트들고 서울로

등록 2011-06-19 20:09

‘5·18’을 표현한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실린 1980년 6월2일치 석간 <전남매일신문> 1면. 계엄군은 사전검열로 시의 원문 109행 곳곳에 붉은 펜으로 삭제를 지시했고,(위쪽) 결국 제목의 앞부분과 33행만 실렸다.(아래쪽) 필자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이 신문을 구해 전국 곳곳의 여교사들에게 보냈다.  <부끄러운 탈출> 중에서
‘5·18’을 표현한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실린 1980년 6월2일치 석간 <전남매일신문> 1면. 계엄군은 사전검열로 시의 원문 109행 곳곳에 붉은 펜으로 삭제를 지시했고,(위쪽) 결국 제목의 앞부분과 33행만 실렸다.(아래쪽) 필자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이 신문을 구해 전국 곳곳의 여교사들에게 보냈다. <부끄러운 탈출> 중에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25
1980년 5·18 직후 광주시내 모든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렸고, 계엄군이 다시 도청을 장악한 27일까지 광주시내는 열흘간 통신과 교통이 완전히 끊겼다. 하지만 섬처럼 고립된 무정부 상태에서도 광주 사람들은 민주시민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병원 앞에는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하는 시민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은행이나 경찰서 앞에는 ‘우리 시민들의 재산입니다. 절대로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글귀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고, 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금은방이나 주유소가 털렸다는 사례도 단 한군데도 없었다. 우리 아파트단지만 해도 주민들이 생필품을 살 수 있게끔 약국과 작은 슈퍼마켓까지도 문을 열었다.

반면 중앙 언론에서는 광주의 실상과는 정반대의 날조된 보도를 하고 있었다. 광주를 다녀간 박충훈 국무총리는 5월22일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정부의 명령 때문에 발포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분통 터지는 내용이었다.

5월31일 토요일부터 끊겼던 열차와 시외버스·고속버스가 정상운행을 시작했고, 6월2일부터 개학한다는 광고가 났다. 내 육성으로 친구나 친척들에게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개학하기 전 주말에 서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가 다닐 때였는데 오후 2시 개통된 첫차를 탔다. 승객이 별로 없어 나는 맨 앞에 앉았다. 그런데 옆 차로를 달리는 버스나 승용차의 승객들이 우리 버스를 가리키며 쳐다봤다. 열흘 동안 단절됐던 도시, 광주의 버스가 다닌다는 것을 확인하며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렇게 5시간쯤 뒤 서울에 도착하니 해 질 무렵 퇴근시간이었다.

서울 잠실의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자리가 없어 서 있는데 마침 뉴스 시간이었다. 라디오에서는 ‘광주의 폭도들에 의해서 17명이 사망했습니다’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폭도’는 누구고, ‘17명’이라는 숫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수많은 주검을, 상무관 앞의 그 수많은 관들을 내 눈으로 보고 올라오는 길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악 소리가 터져나올 뻔했던 것이다.

폭도라니? 국가폭력에 의해서 무참히 희생된 시민들이 폭도들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군인들의 총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간 그 주검을 어찌 폭도라고 보도를 할 수 있는가? 보도통제에 의해 이렇게 날조된 사실이 전달되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증언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미 항쟁 열흘 동안 많은 내용을 써놓았다. 정부는 정부대로 ‘삐라’를 헬리콥터로 뿌렸고,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상황을 보고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나눠줬다. 그 유인물들을 차곡차곡 모아 나대로 노트에 기록했던 것이다. 서울의 친구와 친척들에게 그 내용을 보여주고 알렸다.

그런데 ‘광주 학살’의 현장을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목격한 증인은 뜻밖에도 독일에서 온 조카딸이었다. 조카딸은 형편이 어려워 간호고교를 졸업한 뒤 1970년대 정부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보냈던 파독 간호사 대열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마침 80년 5월 휴가를 얻어 고향인 광주를 방문했다가 5·18을 겪었고, 독일로 돌아가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알리는 소중한 임무를 해낸 것이다. 숨길 수 없는 진실은 그렇게 여러 통로로 국내외로 퍼져 나갔다.

6월2일 개학하던 날, 항쟁으로 휴간했던 지역신문도 다시 발행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실렸다. 광주의 상황을 잘 묘사한 시였다. 이 시라면 광주의 진실을 무엇보다 잘 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도청 앞에 있던 전남매일신문사로 쫓아갔다. “6월2일치 신문 있는 대로 사고 싶은데요.” 그날 남아 있는 50부를 전부 샀다. 시가 실린 부분만 오려서 5·18 직전 서울의 새마을연수 때 만났던 전국의 여교사들에게 발송했다. 100명이 넘어서 전라도 지역 선생님들을 빼더라도 50부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다시 신문사를 찾아갔지만 더는 없다고 했다. 더 많이 구해서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때는 늘 그 생각만 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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