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박옥줄 옮김/한길사
“외관은 언제나 믿지 못할 것이다.”
700쪽이 넘는 <슬픈 열대>를 관통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언제나’란 말이 중요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잠시’가 아니라 ‘언제나’ 외관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외관이 아니라 그 이면의 심층에 있다. 우리가 세포를 보기 위해 현미경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듯, 심층을 보기 위해 ‘이론적 도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기본 생각이다.
<슬픈 열대>는 1935~38년 레비스트로스가 카두베오·보로로·남비콰라·투피 카와이브족 등 브라질의 4개 원시부족 방문 과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그러나 단지 기행문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문명의 이름으로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는 ‘현대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철학적 고발장’이기도 하다.
■ 풀무질
사례 1 1525년께 푸에르토리코 원주민들은 생포한 백인들을 물속에 던져 죽였다. 그러고 나서 시체가 썩는지 썩지 않는지 보기 위해 익사체 주위에서 몇 주일씩 지키고 앉아 있었다.
사례 2 1512년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5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성적인 창조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원주민 여자와 결혼하는 걸 막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 백인 여자 노예들을 수입하라고 명령했다. 선교사 라스카사스(1474~1566)가 원주민 강제노동을 금지하라고 왕실에 탄원했을 때, 식민주의자들은 “뭐라고? 그는 우리가 ‘일하는 짐승들’을 사용하지 말기를 원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은 악덕에 깊이 물들어 자립생활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자유로운 동물보다는 인간의 노예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동물이기를 바랐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신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데 만족했다”며 “양쪽이 똑같이 무지했으나, 그래도 원주민들 생각이 더 인간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한다. 문명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식인 풍습에 대해서도 레비 스트로스는 다르게 분석한다. 그는 고기가 모자라 서로를 잡아먹는 경우는 제외한다. 어떤 사회도 굶주림에서 나오는 요구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1972년 10월 승객 45명을 태운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 해발 3500m 지점에 추락했다. 생존자 16명은 영하 40℃의 혹한에 인육을 먹으며 버티다 72일 만에 구조됐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1993년 만들어진 영화가 <얼라이브>다. -편집자) 식인 풍습은 종교적·주술적·문화적 배경이 있다. 조상이나 적의 시체의 살점을 먹어 식인종은 죽은 자의 덕을 획득하거나 그들이 가진 힘을 중화하려고 한다. 문명인이 식인 풍습을 비난하는 도덕적 근거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구분에 따른 것일 뿐이다. 시체를 훼손하면 육체가 부활하지 못하거나 육체와 영혼의 연결 상태가 훼손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타인을 무자비하게 배제하는 문명사회 우리는 식인종이 죽음의 신성함을 부인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시체를 해부학 실습용으로 쓴다. 죽음의 신성함에 대한 무시 정도는 해부학 실습보다 더 크지도 작지도 않다. 식인 사회는 어떤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중화하거나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자신의 육체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에 비해 문명사회는 ‘앙트로포에미아’(특수한 인간을 토해버리거나 축출·배제하는 일)를 채택하는 사회다. 문명사회는 이 끔찍한 존재들을 일정 기간 또는 영원히 고립시켜 사회에서 추방한다. 이들은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혀 모든 인간적 접촉을 거부당한다. 이런 행위는 미개 사회에서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와 정반대 습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보듯 문명인들도 그들 눈에는 야만적으로 보일 것이다. 북아메리카 평원 지대의 일부 인디언들은 죄인을 처벌하지만 문명사회의 교도소처럼 ‘사회적 유대로부터 단절’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죄인은 텐트와 말 등 소유물의 파괴라는 선고를 받는다. 그와 동시에 형벌을 부과한 경찰은 죄인에게 빚을 지게 되며, 그 인디언이 당한 고통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받는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은 그 범죄자가 다시 한번 집단에 대해 빚을 지게 만들고 그가 증여물을 제공함으로써 해결한다. 문명사회 형벌의 개념 속에 들어 있는 죄인의 유아화(幼兒化) 대신에 그가 어떤 종류의 보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더 논리적이다. 원주민과 비교할 때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없는 문명사회가 ‘위대한 정신적 진전’을 이뤘다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는 게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다. 원주민에게는 수치라는 감정이 없다 문명인은 나체를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브라질 원주민들은 완전히 벗고 다니거나 성기 가리개를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에게 성기 가리개란 발기 예방보다는 남자의 마음이 평정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고 사는 사람들은 이른바 ‘수치’라는 감정을 모른다. 문명인은 먹고 마시는 데 집착하지만, 예를 들어 남비콰라족에게 1년 중 반은 식사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편일 뿐이다. 이들은 백인 한 사람의 배고픔도 진정시켜주기에 충분치 못할 양으로 한 가족이 즐겁게 먹는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 곳곳에서 문명의 이름으로 원시인들을 개화하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재앙만 불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백인 문명은 원주민에게 맞지 않았고, 되레 그들이 가져온 병 때문에 인디언 인구는 격감했다. 백인들과 함께 들어왔던 각종 질병(나병·중풍·혼수상태·무른궤양 등)으로 남비콰라족은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1915년만 해도 남비콰라족의 인구는 2만명 정도로 추산됐으나 레비스트로스가 갔던 1938년 당시에는 수백명 정도로 줄었다. 남비콰라족의 한 분파인 ‘사바네’ 집단은 1900년께 1000명이 넘었지만 1928년에는 남자 127명과 거기 딸린 여자와 아이들로 줄었고, 1938년에는 남자 19명과 거기 딸린 아내와 아이들뿐이었다.
■ 마치질
야생의 사고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레비스트로스는 1962년 펴낸 <야생의 사고>(사진)에서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가 지식은 차이가 날지언정 논리는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다.
원시인 사고방식의 한계로 자주 지적되는 게 추상적 개념어가 없다는 점이다. 원시 부족은 동식물의 종(種)이나 변종(變種)은 세밀하게 분류해 이름을 붙이지만 ‘나무’나 ‘동물’처럼 하나로 뭉뚱그리는 추상적 관념어(개념어)는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추상적 관념어가 풍부하다는 게 문명사회의 독점적 특징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북미 인디언 치누크족은 항상 추상어로 표현한다. 이들은 “그 악인이 가엾은 아이를 죽였다”를 “그 사나이의 악이 그 아이의 가엾음을 죽였다”고 표현한다.
원시 부족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사물한테만 명칭을 부여해 개념을 형성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전문가들도 자기 전문 분야와 직접 관계없는 현상에는 무관심하다.
필리핀 하누누족은 그 지역 식물군의 극히 일부만 이용할 뿐이라는 가설과는 달리 그들은 전체 식물의 93%를 인식하고 조류를 75개 범주로 분류한다. 미국 뉴멕시코의 테와족 인디언은 모든 침엽수에 이름을 붙인다. 잎사귀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 40개, 옥수수의 각 부분을 나타내는 말이 15개나 된다. 식물학 논문을 테와족 언어로 번역하더라도 큰 지장이 없을 정도다. 이와 같이 체계적 지식이 반드시 실용적 목적만 있는 건 아니다. 파충류는 인디언에게 아무런 경제적 효용이 없지만, 미국 동북부 인디언들은 파충류학을 발달시켰다.
미개인들은 단지 생리적·경제적 요구에 따라 움직인다는 편견이 있지만, 그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평가하며 그들의 지적 욕구가 문명인보다 훨씬 조화롭다고 생각한다. 하와이 원주민들, 아마존 원주민들은 천연자원을 완벽하게 활용했다. 이에 비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몇몇 자원만 무자비하게 개발하고 다른 건 말살하는 현대 상업주의적 자원 이용은 문명적이라고 할 수 없다. 불모지인 미국 남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수천명의 코아우일라 인디언들은 천연자원을 고갈시킨 적이 없는데, 오늘날 같은 지역에는 몇몇 백인 가족들이 겨우 생존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원시 부족은 동식물을 분류하면서 자연과 우주에 어떤 질서를 부여한다. 분류하는 것 그 자체는 어떤 형태로 분류하든지 분류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현대 과학자들도 엄청나게 분류한다. 과학자들은 불확실성이나 좌절은 참고 견디지만 절대 견디지 못하는 게 있으니 무질서다. 현대 과학의 기본 가정은 자연에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과학이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일컫는 사고는 이러한 질서에 대한 요구에 기초를 두고 있다.”
■ 담금질
문명에 치여 스님이 된 산골 소녀 영자
지난 2000년 7월 한 방송 다큐멘터리가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주인공은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부근의 산골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산골 소녀 영자였다. 당시 18살. 그는 미미와 꼬꼬라는 두 마리의 닭을 친구로 삼아, 도회지 사람의 눈에 비치기에는 ‘야생의 삶’을 살고 있었다.
영자는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전국 각지에서 책이 쏟아졌다. 영자를 후원하겠다는 사람도 줄을 섰다. 그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도시로 떠났고, 아버지는 홀로 집을 지켰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1년 2월 후원금을 노린 강도에게 아버지가 피살됐다. 더구나 후원자를 자처한 사람마저 돈을 빼돌려 구속됐다. 충격을 받은 영자는 학교를 그만뒀고 그해 4월 속세를 떠나 강원도 삼척의 한 암자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됐다. 법명 도혜.
산골 소녀 영자를 처음 세상에 알린 건 스스로 ‘글쓰는 사진가’라고 부르는 이지누씨였다. 이씨는 1997년 오지를 찾아다니며 산골 문화를 조사하다 영자 부녀를 만났다. 그는 1999년 한 잡지에 산골 소녀 영자를 소개하는 글을 썼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주소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고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그 집요한 사람들은 이내 그녀가 사는 곳을 알아내고 말았다. 그들은 기어코 그녀에게 텔레비전 카메라를 들이댔고 그녀의 집에 전기나 전화가 없다는 것이나 혹은 그 집에 가려면 오로지 걸어서만 가야 하는 불편함을 오히려 내세워가면서 말이다. 사람에 굶주린 도회지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열광하며 무방비의 그 아이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 내 보기에 영자는 별다른 아쉬움이 없는 아이였다. 아버지와 미미 그리고 꼬꼬라는 닭 두 마리면 충분히 행복했던 것이다. 간혹 아버지와 함께 도계읍이나 삼척으로 장도 볼 겸 나들이를 나가는 것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이에게도 나름대로 존중해야 할 문화의 생산과 소비양태는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 그러나 도회지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과 같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무엇이라도 그녀에게 나눠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양은 생각지도 못한 채 서로 앞다투어 그녀에게 책을 보내기를 원했다. 문학을 꿈꾸는 소녀이었기에 텔레비전 덕분에 공개되어버린 주소로 무지막지하게 책은 배달되었고 이윽고 그녀의 방은 책으로 넘쳐 결국 마당 한쪽에 책을 보관하는 광을 따로 지어야 했다. 과연 그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책을 보내려던 자신을 위한 일이었을까. 자못 궁금한 일이다.”(이지누씨가 <한겨레> 2006년 11월10일치에 쓴 ‘산골 소녀 영자야 내 욕심이었어’ 중에서)
2001년 늦가을 그 집을 다녀왔던 이씨의 후배가 전해 준, 영자가 쓴 짧은 글에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신이 보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이지누다”라고 적혀 있었다. 남미 원주민들은 처음 서양인들을 봤을 때 ‘신 또는 신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산골 소녀 영자도 비슷했다. 그리고 결과도 똑같았다.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아래 글은 과학과 주술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요약했다. 이 견해에 찬반을 밝히시오. (1200자) 과학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결정론이다. 즉 어떤 결과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으며, 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 ‘원인-결과 법칙’을 수립한다. 뉴턴이 했듯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건 중력의 법칙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에 비해 원시 부족의 주술은 과학적 사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 생각에 원시인들의 주술적 사고는 결정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되레 결정론을 추구하는 욕구가 더 강렬하다. 예를 들어 곡식 창고의 대들보가 썩어 한 남자 머리에 내려앉는다면 아잔데족은 곡식창고가 마술과 결탁해서 그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곡식창고의 대들보는 어떤 경우든 내려앉을 수 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남자가 밑에서 쉬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무너졌고, 여러 가지 원인들 가운데 간섭의 여지가 있는 건 마술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술과 과학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즉 주술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결정론을 전제하는 데 비해, 과학은 우선 여러 개의 차원을 구분하고 그중의 일부에만 결정론적 형식을 부여하며 그 밖의 차원에는 같은 결정론적 형식을 적용하지 않는다. 주술은 과학의 은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주술과 과학을 대립시키지 말고, 양자를 지식 습득의 두 가지 병행하는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 둘의 이론적·실제적 성과는 같지 않다. 성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술도 때로는 성과를 발휘함으로써 과학을 앞지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과학이 주술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과 주술은 같은 성질의 지적 작업을 요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적 작업의 성격이 아니라 적용되는 현상의 유형일 뿐이다. 2. 레비스트로스의 야생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바탕으로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주장을 비평하시오. 아래 글을 참고하시오. (800자) “이 거대한 서구문명이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기적을 낳기는 했으나, 부작용이 안 생기도록 만드는 데는 분명히 성공하지 못했다. 알려지지 않았던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낸 서양문명 최대의 고명한 작품인 원자로의 경우처럼, 서구의 질서와 조화는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 막대한 양의 해로운 부산물의 제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중학생의 공부하는 힘 1318클래스(1318class.com) 공동기획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박옥줄 옮김/한길사
‘수치’라는 관념이 없는 브라질 원주민들에게 나체 생활은 자연스럽다.
사례 2 1512년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5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이성적인 창조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원주민 여자와 결혼하는 걸 막기 위해 서인도 제도에 백인 여자 노예들을 수입하라고 명령했다. 선교사 라스카사스(1474~1566)가 원주민 강제노동을 금지하라고 왕실에 탄원했을 때, 식민주의자들은 “뭐라고? 그는 우리가 ‘일하는 짐승들’을 사용하지 말기를 원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식민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은 악덕에 깊이 물들어 자립생활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자유로운 동물보다는 인간의 노예가 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동물이기를 바랐지만,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신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데 만족했다”며 “양쪽이 똑같이 무지했으나, 그래도 원주민들 생각이 더 인간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한다. 문명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식인 풍습에 대해서도 레비 스트로스는 다르게 분석한다. 그는 고기가 모자라 서로를 잡아먹는 경우는 제외한다. 어떤 사회도 굶주림에서 나오는 요구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1972년 10월 승객 45명을 태운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 해발 3500m 지점에 추락했다. 생존자 16명은 영하 40℃의 혹한에 인육을 먹으며 버티다 72일 만에 구조됐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1993년 만들어진 영화가 <얼라이브>다. -편집자) 식인 풍습은 종교적·주술적·문화적 배경이 있다. 조상이나 적의 시체의 살점을 먹어 식인종은 죽은 자의 덕을 획득하거나 그들이 가진 힘을 중화하려고 한다. 문명인이 식인 풍습을 비난하는 도덕적 근거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구분에 따른 것일 뿐이다. 시체를 훼손하면 육체가 부활하지 못하거나 육체와 영혼의 연결 상태가 훼손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타인을 무자비하게 배제하는 문명사회 우리는 식인종이 죽음의 신성함을 부인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시체를 해부학 실습용으로 쓴다. 죽음의 신성함에 대한 무시 정도는 해부학 실습보다 더 크지도 작지도 않다. 식인 사회는 어떤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중화하거나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자신의 육체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에 비해 문명사회는 ‘앙트로포에미아’(특수한 인간을 토해버리거나 축출·배제하는 일)를 채택하는 사회다. 문명사회는 이 끔찍한 존재들을 일정 기간 또는 영원히 고립시켜 사회에서 추방한다. 이들은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혀 모든 인간적 접촉을 거부당한다. 이런 행위는 미개 사회에서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우리와 정반대 습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보듯 문명인들도 그들 눈에는 야만적으로 보일 것이다. 북아메리카 평원 지대의 일부 인디언들은 죄인을 처벌하지만 문명사회의 교도소처럼 ‘사회적 유대로부터 단절’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죄인은 텐트와 말 등 소유물의 파괴라는 선고를 받는다. 그와 동시에 형벌을 부과한 경찰은 죄인에게 빚을 지게 되며, 그 인디언이 당한 고통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받는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은 그 범죄자가 다시 한번 집단에 대해 빚을 지게 만들고 그가 증여물을 제공함으로써 해결한다. 문명사회 형벌의 개념 속에 들어 있는 죄인의 유아화(幼兒化) 대신에 그가 어떤 종류의 보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더 논리적이다. 원주민과 비교할 때 더 인간적이라고 볼 수 없는 문명사회가 ‘위대한 정신적 진전’을 이뤘다고 자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는 게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이다. 원주민에게는 수치라는 감정이 없다 문명인은 나체를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브라질 원주민들은 완전히 벗고 다니거나 성기 가리개를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에게 성기 가리개란 발기 예방보다는 남자의 마음이 평정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고 사는 사람들은 이른바 ‘수치’라는 감정을 모른다. 문명인은 먹고 마시는 데 집착하지만, 예를 들어 남비콰라족에게 1년 중 반은 식사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편일 뿐이다. 이들은 백인 한 사람의 배고픔도 진정시켜주기에 충분치 못할 양으로 한 가족이 즐겁게 먹는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 곳곳에서 문명의 이름으로 원시인들을 개화하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 재앙만 불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백인 문명은 원주민에게 맞지 않았고, 되레 그들이 가져온 병 때문에 인디언 인구는 격감했다. 백인들과 함께 들어왔던 각종 질병(나병·중풍·혼수상태·무른궤양 등)으로 남비콰라족은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1915년만 해도 남비콰라족의 인구는 2만명 정도로 추산됐으나 레비스트로스가 갔던 1938년 당시에는 수백명 정도로 줄었다. 남비콰라족의 한 분파인 ‘사바네’ 집단은 1900년께 1000명이 넘었지만 1928년에는 남자 127명과 거기 딸린 여자와 아이들로 줄었고, 1938년에는 남자 19명과 거기 딸린 아내와 아이들뿐이었다.
■ 마치질
야생의 사고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 담금질
문명에 치여 스님이 된 산골 소녀 영자
1999년 9월에 찍은 산골 소녀 영자. 이지누 제공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아래 글은 과학과 주술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을 요약했다. 이 견해에 찬반을 밝히시오. (1200자) 과학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결정론이다. 즉 어떤 결과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으며, 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 ‘원인-결과 법칙’을 수립한다. 뉴턴이 했듯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건 중력의 법칙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에 비해 원시 부족의 주술은 과학적 사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 생각에 원시인들의 주술적 사고는 결정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되레 결정론을 추구하는 욕구가 더 강렬하다. 예를 들어 곡식 창고의 대들보가 썩어 한 남자 머리에 내려앉는다면 아잔데족은 곡식창고가 마술과 결탁해서 그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곡식창고의 대들보는 어떤 경우든 내려앉을 수 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남자가 밑에서 쉬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무너졌고, 여러 가지 원인들 가운데 간섭의 여지가 있는 건 마술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술과 과학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즉 주술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결정론을 전제하는 데 비해, 과학은 우선 여러 개의 차원을 구분하고 그중의 일부에만 결정론적 형식을 부여하며 그 밖의 차원에는 같은 결정론적 형식을 적용하지 않는다. 주술은 과학의 은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주술과 과학을 대립시키지 말고, 양자를 지식 습득의 두 가지 병행하는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 둘의 이론적·실제적 성과는 같지 않다. 성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술도 때로는 성과를 발휘함으로써 과학을 앞지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과학이 주술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과 주술은 같은 성질의 지적 작업을 요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적 작업의 성격이 아니라 적용되는 현상의 유형일 뿐이다. 2. 레비스트로스의 야생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바탕으로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주장을 비평하시오. 아래 글을 참고하시오. (800자) “이 거대한 서구문명이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기적을 낳기는 했으나, 부작용이 안 생기도록 만드는 데는 분명히 성공하지 못했다. 알려지지 않았던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낸 서양문명 최대의 고명한 작품인 원자로의 경우처럼, 서구의 질서와 조화는 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는 막대한 양의 해로운 부산물의 제거를 필요로 하고 있다.” 중학생의 공부하는 힘 1318클래스(1318class.com)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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