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10일 서울·광주·춘천·부산 등 4개 도시에서 ‘교육민주화 선언’을 주도한 한국와이엠시에이 중등교사협의회의 윤영규 회장(초대 전교조 위원장·2005년 작고)의 인터뷰 기사가 <동아일보> 5월15일치에 실렸다. 당시 언론의 지지는 정권의 탄압에 맞서는 큰 힘이 됐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42
1986년 5월10일 서울·광주·춘천·부산 등 4개 도시에서 한국와이엠시에이(YMCA·와이교협) 중등교사협의회 소속 교사들이 교사의 날 행사를 열고 ‘교육민주화 선언’을 했다. 광주농고에 재직하던 나는 광주지역 공립학교 교사로는 유일하게 이 선언에 참여했다. 역시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해 봄부터 4개 지역 교사들은 주말이면 대전 등지에서 예비회의를 열어 ‘선언’을 추진했다. 이 모임에서 5월에 공개 대중 행사를 열 것과, 그 추진 주체를 와이교협이 맡기로 결의했다. 와이교협에서는 ‘스승의 날’과 다른 의미를 부여한 ‘교사의 날’인 5월10일을 택해 지역별로 행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4월1일 둘째아들이 큰 교통사고를 냈다. 취직시험 준비하느라 밤 12시까지 대학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차를 몰고 귀가하던 길이었는데, 만취한 사람이 대로에서 비틀거리며 방황하다가 차에 치인 것이다.
다리를 다쳐 12주 진단이 나왔다. 상대방과 합의가 안 되면 구속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교통법규에는 육교 바로 밑에서 사고가 나면 보행자가 잘못을 했더라도 무조건 운전자 과실이었다. 담당 경찰을 통해 피해자가 돈을 노린 상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고맙게도 안영덕 교장 선생님과 당시 부장판사였던 이진영 변호사님이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덕분에 사건은 불구속에서 집행유예로, 집행유예에서 다시 벌금형으로 처리가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 1년3개월 남짓 동안의 긴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말 예비회의 참석, 교통사고 처리, 피해자 병원 방문 등으로 정신없이 지내는 와중에 ‘선언’ 예정일이 가까워졌다. 그 무렵 교육위원회(현 교육청)에서 학교로 전화가 왔다. 교사들의 행사 참여를 막으라는 것이었다. 전국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시장 초청 간담회, 백지 시험지 사건 등으로 이미 ‘찍혀’ 있던 터라 요주의 대상이었다. 예상대로 교장 선생님이 불러 “무슨 행사가 있는 것 같은데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로서는 아들 교통사고 때 헌신적으로 도와준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난감하고 힘들었지만 ‘가야 한다’고 의사를 밝혔다.
행사장은 전남도청 앞 광주와이엠시에이(YMCA) 2층 백제실이었다. 1층 와이다방에 먼저 들어갔더니 교육청을 옮겨놓은 듯 장학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들을 비롯한 관리자들은 입구에서 지키고 있다가 자기 학교 선생님이 오면 가로막거나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강당 안에는 교사들이 가득 찼고 열기는 넘쳤다. 박남 선생님(수피아여고)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우리 교사들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의 올곧은 시선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방관자로 남아 있는 우리를 더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다… 인간미 넘치는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은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비정한 점수경쟁과 물질만능 상업주의 문화의 홍수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방황하고 있다… 교육개혁은 교육, 인간 및 사회를 보는 관점의 개혁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학생·학부모를 교육주체의 자리에 확고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육민주화의 첫걸음이다….”
벅찼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우리 교사들이 독립선언을 한 느낌이었다. 나만 그랬겠는가? 우리 젊은 동지들도 뜻이 그러했기에 불참 종용, 가택연금 등의 방해를 뚫고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둘째아들의 교통사고 뒤처리 때문에 선언 낭독이 끝나자마자 먼저 나왔다.
이튿날 교장실로 불려갔더니 얼굴이 굳어 있었다. “오늘 교육청에서 불러 가보니까 공립학교에서는 선생님 혼자 참석했다던데요?” 다른 공립학교 선생님들은 입구에서 붙들려 못 들어가는 바람에 참석자는 전부 사립교사였다. 마침 그때 교장단이 외국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만 나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출국정지를 당했다. “죄송합니다. 참석은 분명히 했는데 다른 약속이 있어 끝나기 전에 나왔거든요.” “정 선생, 끝나기 전에 나갔어요?” 교장 선생님은 교육청에 ‘내가 끝나기 전에 나갔다’는 사실을 보고했던지, 외국 출장 대열에 늦게나마 합류할 수 있었다. ‘선언’은 교육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충격을 주었다. 문교부는 선언 다음날 ‘주동자 중징계 방침’을 밝혔다. 와이교협 회원 탈퇴 공작도 이어졌다.
당국의 탄압과 달리 당시 <한국일본>와 <동아일보> 등 중앙지는 물론 지역 신문에서는 사설을 통해 교사들의 고뇌와 갈망에 호응해 주었고 ‘선언’ 참여 교사들에 대한 징계를 비판했다. 감사할 일이었다. 언론이 함께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밝아질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탄압을 받기는 했지만 사회 민주화를 위해 함께 내디딘 발걸음의 의미를 생각하면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이튿날 교장실로 불려갔더니 얼굴이 굳어 있었다. “오늘 교육청에서 불러 가보니까 공립학교에서는 선생님 혼자 참석했다던데요?” 다른 공립학교 선생님들은 입구에서 붙들려 못 들어가는 바람에 참석자는 전부 사립교사였다. 마침 그때 교장단이 외국 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만 나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출국정지를 당했다. “죄송합니다. 참석은 분명히 했는데 다른 약속이 있어 끝나기 전에 나왔거든요.” “정 선생, 끝나기 전에 나갔어요?” 교장 선생님은 교육청에 ‘내가 끝나기 전에 나갔다’는 사실을 보고했던지, 외국 출장 대열에 늦게나마 합류할 수 있었다. ‘선언’은 교육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충격을 주었다. 문교부는 선언 다음날 ‘주동자 중징계 방침’을 밝혔다. 와이교협 회원 탈퇴 공작도 이어졌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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