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2일 전국교사협의회 윤영규 회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상반기 노조 결성 추진’을 공식 천명하면서 전국적으로 노조 발기인 모집과 건설기금 마련을 위한 교사들의 조직 활동이 본격화됐다. 사진은 그해 2월19일 단국대에서 열린 정기 대의원대회에 참가한 필자.(단상 왼쪽)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50
1988년 하반기는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의 여러 회의와 모임으로 무척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다. 전교협 회의 진행 과정에 맞춰 단위학교 평교사회 활동도 활발했다. 교원노조 문제가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해 7월 경기도 부천 작은자리에서 열린 전교협 임원연수에서였다. 나는 연수에서 이규환 전 이화여대 교수님과 이수일 선생님 등을 만났다. 우리 교육현실과 교육이론, 그리고 교원노조 등의 논의를 위해 한국교육연구소 소속 연구원들과도 만났는데 이규환 교수님이 소장을 맡고 계셨다.
전국적인 조직체계는 갖추었지만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한 협의체 수준의 임의단체였던 전교협은 법적·제도적 한계를 뛰어넘는 조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임원연수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노동3권을 쟁취해야 하며, 노동3권을 행사하는 합법적인 조직은 노동조합이다’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8월 대의원대회에서 ‘교원노조 건설을 전망하며 2학기부터 노동3권 쟁취를 위한 교육법 개정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이어 12월27~29일 겨울 임원연수에서 법 개정에 상관없이 ‘선 노조 건설, 후 합법화 쟁취’를 결의했고, 이듬해 1월20일 중앙위원회는 ‘89년 상반기 안에 노조 건설’을 결정했다.
89년 2월2일 전교협 회장단(회장 윤영규, 부회장 이규삼 오종렬 이부영)은 기자회견을 열어 ‘상반기 노조 결성 추진’을 공식 천명했다. 전교협은 곧바로 전국과 지역에 ‘교직원노조 건설 추진 특별위원회’(전국위원장 이규삼)를 구성하고, 발기인 모집과 노조 건설기금 마련 등 교사들의 참여를 조직하며 노조 건설을 위한 준비를 차분하고도 속도감 있게 진행했다. 5월14일, 전국의 10개 시·도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발기인대회 및 준비위원회 결성대회’가 동시에 열렸다.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탄생을 바로 앞두고 있었다.
노조 결성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권은 ‘의식화교육 교사’라고 왜곡·매도하며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정부는 89년 1월과 2월 ‘대통령 지시사항’, 4월과 5월 ‘문교부와 시·도교육위원회(현 교육청)의 지시사항’ 등을 통해 노조 추진 교사를 좌경 의식화 교사로 규정하고 특별대책을 강구하기로 한다. 이 대책에 따라 시·도교육위원회는 ‘교사 블랙리스트’를 작성했고, ‘교원노조 결성 예방 지도지침’을 마련해 학부모들에게 교원노조 결성의 부당성을 홍보하는 가정통신문을 전국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바로 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느라 장학사·교장·교감 등 관리자들이 총동원되었다.
국회에서도 교원노조 건설의 길을 트는 듯 보였다. 그해 3월9일 야3당(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은 ‘제13대 국회’ 본회의에서 단일안으로 ‘6급 이하 공무원을 포함한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있고 단체교섭을 행할 수 있다. 단, 현역군인,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교정공무원은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내용의 노동조합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당인 민정당은 교원노조 절대 불허 방침을 밝혔고, 결국 노태우 대통령의 ‘노동조합법 개정법률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교원노조 합법화 길이 막히고 말았다.
정부의 방해와 탄압은 집요했다. 단위학교에서도 교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방해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광주·전남 발기인대회일에 맞춰 5월13~14일 경북 문경으로 1박2일 친목대회를 간다고 했다. 교장·교감 등 친목회 간부들은 “정 선생님, 가세요, 안 가세요?” 하며 넌지시 내 눈치를 떠보았다. “가지요. 왜요?” “가요?”
나는 기분 좋게 문경으로 같이 출발했다. 첫날 토요일 늦은 저녁까지 계획된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하고, 1년 후배인 조영숙 교감 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 일찍 메모를 남겨두고 광주로 오려는데 교감도 같이 일어났다. 얘기를 할까 하다 화장실 가는 것처럼 그냥 나오려는데 “어디 가세요. 산보?” 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응, 나 갈거야. 원래 갈 생각을 하고 온 거야. 막아봐야 소용없으니 그렇게 알고 자고 있으면 되잖아. 나 간 줄 몰랐다고 하고….” 나는 택시를 타고 천안까지 와서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다시 택시로 대회장인 전남대 입구까지 왔는데 “들어가겠다”는 교사들과 “못 들여보내겠다”는 장학사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와 좋은 동료관계로 지냈고 이후 광주교육감이 된 김원본 장학관도 교문에서 교사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있어서 무사히 안으로 들어가 전남대 강당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결국 교장·교감의 기발한 방해책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못 말리는 여교사’가 되어 이후 일거수일투족이 상부에 보고되었다. 얼마나 세세하게 보고되었는지는 해직 때 징계위원회에서 알게 되었다. 회고하는 지금이니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많은 것을 곱씹어봐야 하는 엄혹한 나날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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