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당시 대구 경화여고 3학년생으로 학생회 간부였던 김수경(오른쪽) 학생은 전교조 교사 징계 반대 활동을 이유로 재단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하다 6월5일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 경화여고는 2005년 그에게 명예졸업장(왼쪽)을 수여했다. 사진 김수경열사추모사업회 제공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57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출범기인 1989년 여름은 정권의 탄압과 이에 맞선 참교육 운동의 열기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특히 6월부터 8월에 이르는 석달 동안 중·고교들의 ‘참교육’ 지지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들의 몸짓은 교육의 한 주체로서 자신들이 처한 교육현실을 인식하고 자각한 집단적 의사표현이었다.
그해 7월6일 광주 송원학원 재단 소속 5개 학교(송원고·송원중·송원여중·송원여고·송원여실고) 학생회가 발표한 ‘송원 선생님들께 드리는 글’은 학생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암담한 교육현실에서 우리 교사들이 어떤 길을 택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뼈아프게 적시하고 있다.
“…저희는 무엇이 참교육인지, 과연 교원노조가 법에 위배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비좁은 교실, 한겨울 영하 3도가 되어야만 먼지 나는 석탄난로를 땔 수 있는 그런 교실, 얼어붙은 두 손을 호호 불어가며 수업하는 그런 교실은 더 이상 싫습니다. 1년에 100여명의 학생들을 죽음의 길로 이끄는 살인적인 입시경쟁,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마저 경쟁자로 생각하며 ‘나’ 자신밖에 모르고 살아가게 하는 경쟁과 점수따기 교육을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 민주가 무엇이냐는, 통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쉬쉬하며 진도만 나가려는 선생님의 비겁한 모습은 더 이상 보기가 싫습니다. … 저희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 선생님들이 저희를 사랑하고 지켜주시듯이 저희들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지켜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의 지지 투쟁은 방법도 다양했다. 도시락을 교실 한쪽에 모아놓고 ‘점심 굶기 투쟁’을 하거나 ‘밤샘공부’라는 농성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시험 거부, 도학력고사 답안지 똑같이 작성하기, 조기방학 거부, 학생회장단 삭발, 언론사에 탄원서 제출, 학부모와 토론회 개최, 학생회 비상총회 및 성명서 발표, 종이비행기 날리기 등으로 자신들의 뜻을 밝혔다. 일부는 혈서 쓰기, 명동성당 단식농성 참여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 가운데 정권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학생들의 농성과 시위, 거리 진출이었다. 조기방학과 방학중 교사 대량해직 상황이 예고되면서 학생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됐던 까닭이다. 7월 중순까지 44개 학교가 조기방학을 하자 50개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전교조가 확인한 사례만 8월 초순까지 전국 211개 학교에서 34만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개별 학교 단위로 진행되던 참교육 지지 투쟁은 차츰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광주에서는 7월20일 20개 학교 2만5000여명의 학생이 학교별로 운동장에서 교사 징계 반대와 조기방학 철회를 요구하는 항의집회를 한 뒤 거리행진도 했다. 7월29일에는 고교생 3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의장 강위원·광주 서석고)를 결성했다. 8월과 9월에는 부산(부고협·의장 황순주·부산 용인고)과 마산·창원(마창고협·의장 조성호·창신고)에서도 협의회가 꾸려졌다. 앞서 7월 ‘서울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도 결성식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정권은 학생들까지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그해 12월까지 구속·불구속입건·퇴학·무기정학·유기정학 등 242명의 중고생들이 징계를 당했다. 교장이 학생을 경찰에 고발하거나, 학교징계위원회에서 부결시켰는데도 교장 직권으로 퇴학시키는 참담한 만행이 자행됐다. 학생을 감금해 구타하고, 해직된 담임선생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의식화 학생’으로 찍어 사범대 입학원서 작성을 안 해주는 학교도 있었다.
급기야 90년 6월5일에는 사립학교인 대구 경화여고 3학년생인 김수경 학생이 재단의 악랄한 탄압에 못 견뎌 자살하는 비극이 터졌다.
김수경은 2학년 때 학급회장을 맡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89년 경화여중·고 교사들도 평교사회 결성 등 학교 민주화 투쟁을 적극 벌였고, 학생들도 민주적 학생회 건설 운동에 나섰다.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전교조 교사들이 징계 대상이 되자 김수경은 앞장서서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끝내 10명의 해직교사가 학교를 떠난 뒤, 재단 편에 선 교사들은 학생회를 와해시키고자 김수경을 따돌렸고, 노골적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그날 밤 야간자습을 하다 홀로 학교를 나온 김수경은 영남대의 한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이 다닐 곳이 못 됩니다. …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 내 죽음을 왜곡하지 마세요!”
이처럼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자 전교조는 10월 ‘학생탄압 대책위’를 결성했다. 대책위에는 전교조공동대책위, 학부모회, 민주동문회가 함께했다. 11월 말에는 광고협 이형준 의장(2대), 부고협 황순주 의장, 마고협 전경국 부의장, 남서울상고 김설준 등 학생 대표단이 평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한 학생들의 눈물겨운 투쟁과 엄청난 희생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씻기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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