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위원장이 1990년 6월26일 아침 5시께 수감중이던 원주교도소에서 1년 형기를 마치고 출감해 마중나온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윤 위원장은 91년 6월 또다시 수배를 받아 필자를 비롯한 지인들의 협조 속에 2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66
1991년 초가을쯤, 지금은 고인이 된 김현준 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은 바빠서 광주로 오기 어려우니 나보고 유성까지 와서 물건을 좀 받아 가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요? 누구랑 같이 가도 괜찮죠?” 했더니 “아니요. 혼자 오세요” 하며 유성 톨게이트 부근으로 오라고 했다. 혼자서 차를 운전해서 갔더니 김 선생은 이미 와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운반해야 할 물건은 ‘윤영규 전교조 위원장’이었다. 그 자리에는 윤 위원장 사모님과 고진형 선생도 함께 있었다.
윤 위원장은 6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잠수’하고 있던 터였다. 4월 강경대 열사 타살 사건 이후 책임자 처벌과 대통령 사과, 백골단과 전투경찰 해체, 악법 철폐 및 민주교육법 제정 등을 요구하는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과 공안탄압 분쇄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89년 5월 전교조 결성대회 직후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른 데 이어 또다시 수배된 것이었다.
도피 생활 자체도 힘든 것이지만 윤 위원장의 상황은 더 안타까웠다. 애초 숨어 지내던 곳은 경기도 시흥의 연립주택 밀집 지역으로 기억된다.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옆방에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고, 당신은 다른 방에 피해 있었다.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방이었다. 문밖으로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갇혀 지내다 보니 건강이 많이 나빠져 병원에 가고자 나를 찾은 것이었다. 나는 ‘윤영규 물건’을 싣고 광주 조남중내과로 향했다. 조남중 원장은 목포여중에서 해직된 조명준 선생의 동생이어서 믿을 만한 곳이었다. 진찰을 마친 뒤 ‘물건’을 싣고 다시 목포 인근에 있는 폐결핵 환자 요양원으로 갔다.
윤 위원장은 요양원으로 옮긴 뒤에도 건강이 썩 좋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 건강 관리를 위해 요양원 사람들을 따라 주변의 산을 오르며 난을 캐서는 인사 오는 선생님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여러차례 구속과 수배를 거듭하면서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것도 그에게는 마음의 짐이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 찾아갔더니 가슴 아픈 속내를 비쳤다. 민주화 동지들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남모를 고통을 어찌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으랴.
89년 하반기부터 진행해온 학교 현장 방문은 91년에도 계속하고 있었다. 90년에 설립된 참교육사를 통해 제작된 기념품의 판매 수익 가운데 일정 비율은 지부와 지회에 할당해 운영비와 해직교사 생계 지원금으로 사용됐다. 사실 기념품 판매사업은 전남 조승준 선생이 제일 먼저 했다. 조 선생은 89년 하반기 가수 정태춘이 순회공연했던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의 내용을 테이프에 담아 판매했다. <광주문화방송> 오창규 아나운서의 아주 알찬 사회와 가수 정태춘·박은옥, 김원중 등의 노래로 진행된 공연이었다. 조 선생의 물품 판매가 89년 생계대책특별위원회 구성으로, 다시 ‘참교육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참교육사의 판매 활동에는 해직교사 가족들도 함께했다. 해직교사 부인들은 학교 이외 사무실을 방문하거나 학교 앞에서 노점을 열기도 했다. 가족들의 헌신적 활동은 광주지부를 지탱하는 또 한 축이었다.
학교 방문을 하다 보면 가끔 노골적으로 배타적인 곳도 있었다. 비리 척결을 요구하며 수차례 싸움을 했던 어느 사립학교를 항의방문 했을 때는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쉬는 시간에 해직 교사 일행을 본 학생들이 멀리 유리창 너머로 손짓 인사를 보내오자 현직 선생님들이 교문을 가로막고 나섰다. 물론 재단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로막고 있는 현직 선생님들이나 해직교사들이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다툴 수는 없었다. 대신 해직교사들은 조용조용하지만 강한 항의의 말을 계속 했는데, 간혹 “야 새끼야” 같은 욕을 했다가 웃음을 섞기도 했다. 멀리서 학생들이 볼 때에는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던 것이다.
김종근 선생님이 해직된 사레시오여고를 방문했을 때는 논쟁이 벌어졌다. 교장 수녀님이 “나는 노동조합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는 돈보스코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싫어합니다” 하시며 해직교사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 선생님이 “돈보스코 정신에는 노동자 의식이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결성한 뜻에도 돈보스코 정신이 포함돼 있습니다” 하며 전교조 결성의 의미를 얘기했다.
살레시오회를 창립한 돈보스코 신부는 이탈리아 토리노를 근거지로 삼았다. 토리노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청소년들은 뒷골목을 방황하며 범죄에 물들어 갔다. 이들을 돌보던 돈보스코 신부는 도제학교·공업학교·일요학교 등을 세워 체계적인 교육을 했다. 강요와 체벌을 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신뢰를 중히 여겼다. ‘노동’의 존귀함을 자각하며 노동조합을 건설한 교사를 해직시키며 돈보스코 정신을 얘기하는 아이러니한 시대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살레시오회를 창립한 돈보스코 신부는 이탈리아 토리노를 근거지로 삼았다. 토리노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청소년들은 뒷골목을 방황하며 범죄에 물들어 갔다. 이들을 돌보던 돈보스코 신부는 도제학교·공업학교·일요학교 등을 세워 체계적인 교육을 했다. 강요와 체벌을 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신뢰를 중히 여겼다. ‘노동’의 존귀함을 자각하며 노동조합을 건설한 교사를 해직시키며 돈보스코 정신을 얘기하는 아이러니한 시대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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