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17일 전교조 5대 위원장이자 첫 여성 위원장으로 당선된 필자(가운데)가 3월9일 위원장단과 함께 취임 첫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 무렵 사면조처로 풀려난 이수호(맨 왼쪽)·이부영(왼쪽 둘째) 부위원장 등이 함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73
전교조 5대 위원장 선거를 준비하던 1993년 1월26일 국제교원단체총연맹(EI·이하 국제총연맹)이 창립되었다. 기존의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IFFTU)과 세계교원단체연합(WCOTP)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각각 총회를 열어 해산 결의를 하고, 바로 다음날 하나의 새 단체로 탄생한 것이다. 국제총연맹은 규약에 ‘교육노동자의 노동조합과 전문직 권리 보장, 교육 발전을 통한 세계인권선언 적용, 교원·교육노동자의 전문적 지위 강화와 교육정책 형성에 참여, 인권과 노동조합 권리를 탄압하고 있는 나라에서 교원·교육노동자의 자주적 민주적 단체 발전을 진전시키는 것’ 등을 목적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국제총연맹에는 아직 새로운 단체의 가입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전교조는 이때 가입할 수 없었다. 사실 전교조는 90년 11월, 기존의 두 국제단체에 가입 신청을 했었다. 그러나 전교조와 어떠한 대화 시도도 한 적이 없었던 한국교총이 ‘한 나라에서 두 단체가 가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전교조와 대화를 통해 공동보조를 취할 것이니 그동안은 전교조 가입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가입이 보류됐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두 단체 사무총장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전교조의 가입은 93년 9월30일에야 국제총연맹의 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됐다.
앞서 1월25일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의 마지막 총회에서는 독일과 네덜란드 교원노조가 공동으로 제출한 ‘전교조 인정과 1500여명 해직교사 복직에 관한 긴급 결의안’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채택했다. 교원의 노동기본권은 국제노동기구(ILO)에 의해 결사의 자유로 당연시되고 있다는 것이 각국 회원단체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한국교총은 그때도 말레이시아, 수리남 등 5~6개 단체와 함께 결의안 통과에 반대했다.
나는 1월29일부터 보름 남짓 위원장 후보 유세를 시작했다. ‘참교육 실천, 교권 옹호, 조합원 교육’을 기본사업으로 내세웠다. <전교조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육개혁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명실상부한 현장 교사들을 위한 조직이 되도록 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교육부와 한국교총의 ‘해직교사 복직 불가’ 방침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올바른 교육 개혁, 교사·학생·학부모를 위한 일에는 언제든 어떤 어려움이든 대화로 풀며 협력할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우선 강조했다. “교총 회원들도 교육을 담당하고 있기에 전교조를 이해해줄 것이며, 교육부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전교조에 대해 고려할 것”이라는 기대를 얘기했다.
2월15~17일, 사흘간의 선거에서 나는 5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15개 시·도 지부장이 뽑혔고, 경남지부장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직 교사인 신용균 선생님(거창고)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거창고에서는 지부장을 해직하지 않았다. 거창고는 김찬국 전 연세대 부총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89년 전교조 결성 때에도 조합원을 단 한명도 해직하지 않은 유일한 사학이었다.
전교조 위원장과 지부장 임기는 당선 확정 뒤 바로 시작된다. 그래서 내 임기는 18일부터 시작되었고, 며칠 뒤 위원장단의 첫 공식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었다. 기자회견 전에 집안 어른들께 늦은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 시골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출발할 때는 날씨가 아주 좋았는데 눈이 한두 송이 떨어지더니 갑자기 폭설로 변했다. 겨울철이라 해는 빨리 떨어졌고, 광주 부근 남평쯤의 고갯길에 도착하니 폭설로 차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폭설이 계속되자 차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밤이 되자 택시기사도 버스기사도 차를 놔둔 채 광주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피난 행렬 같았다. 나이 들어 처음 본 광경이었다.
다음날로 예정된 기자회견 준비도 해야 하는데 난감했다. 나도 행렬에 끼어 앞사람만 보고 언덕길을 걸었다. ‘이런 긴급재난 때는 시에서 나와서 모래든 뭐든 뿌려 빨리 조처를 안 하고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만 미끄러진 나는 언덕길 아래로 사정없이 굴러 떨어졌다.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 쌓인 들판만 하얗게 보일 뿐이었다. 가까스로 일어나 조심스럽게 걷다가 다시 떨어졌다. “미끄러우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하는 소리를 듣고도 내가 얼른 일어나지 못하자 누군가 일으켜 주었다. 고갯길에서 두번이나 구르는 순간에도 ‘내일 기자회견이 있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잘못했으면 대퇴부가 나가거나 크게 다칠 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다시 일어나 걸을 수가 있었다. 무사히 서울로 올라온 나는 기자회견에서 임기 2년의 활동 계획과 해직교사 복직 문제에 대한 원칙을 밝혔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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