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통합논술 세미나
<계몽의 변증법> 3. 계몽의 한계
<계몽의 변증법> 3. 계몽의 한계
■ 책 소개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지음/김유동 옮김/문학과지성사 “계몽으로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는데, 그 이후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파시즘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스탈린주의라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저작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두 사람은 이성과 계몽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성과 계몽이 자연뿐 아니라 ‘제2의 자연’으로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관리하면서 파시즘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947년 초판이 나온 <계몽의 변증법>은 한때 잊혀진 책이었으나 되레 현재의 자본주의 분석에 더 유용해 보인다. 단, 분석은 정교하나 문제 해결 방안은 찾기 힘들다는 게 한계다.
■ 풀무질
기독교 문명에는 ‘타자’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아랍이라는 ‘외부의 타자’요, 또 하나는 유대인이라는 ‘내부의 타자’다. 십자군 전쟁은 외부의 타자를 향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오래되고 강렬하고 끈질겼던 게 내부의 타자인 유대인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서양은 타자에 대한 전쟁을 통해 기독교 문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유대인 탓으로 돌려 자신의 정체성, 즉 동일성을 더 강화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뼈까지 비료로 썼듯이, 그들의 존재 자체는 기독교 유럽이라는 동일성 강화에 단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재료였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볼 때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광기와 결합된 역사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계몽의 변증법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일단 경제구조의 산물이다. 유대인들은 원래 부가가치의 원천,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다. 생산수단 소유는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유대인들은 생산 부문에 참가할 수 없었으므로 유통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근대 부르주아들은 임노동이 착취의 근원이라는 점을 숨기기 위해 또 하나의 ‘착취의 가상’을 만들어냈다. “당신들이 임금을 적게 받고 착취당하는 것은 유통에 종사하는 유대인 탓”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유대인은 고대에는 상업 분야에서, 근대에는 금융 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여러 지방에 전파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게 된 많은 사람들의 증오를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유대인은 처음부터 경제적 진보의 과정에서 자본주의 때문에 몰락한 수공업자나 농민들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다. 유대인은 희생양이었다. 전체 계급의 경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이 그의 어깨에 지워졌다.
가난한 자일수록 유대인 혐오
따라서 소득이 적은 사람일수록 현명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광적으로 반유대인 운동을 지지했다. 반유대주의는 고상한 상류 집단에 의해 지지되며, 하층민은 반유대주의를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행동대원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종교적 기원이 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둔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적 원리에 따르면 메시아는 재현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예수를 유대교는 인정할 수 없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의 육화된 정신임을 믿는다.
“육화된 정신인 그리스도는 신격화된 주술사다. 인간이 스스로의 모습을 절대적인 것 속에 투영시키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인간화는 ‘제1의 거짓말’이다. 유대교를 넘어서는 진보는 인간 예수가 신이라는 주장에 의해 얻어진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유대교는 자연적이고 기독교는 이성적·계몽적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벗어나 진보했듯이, 기독교도 유대교를 벗어나 진보했다. 인간이 자연을 분류하고 계산하고 지배했듯이 기독교도 자신의 틀에 맞춰 유대교를 지배하려 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기독교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반유대주의가 생겼다.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는 계몽과 이성이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이에 반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축출해버리는 것과 똑같다.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은 ‘이디오진크라지’에 호소한다. 이디오진크라지는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무조건적인 공포감을 일컫는다. 이디오진크라지는 생물학적인 원초 상태다. 듣기만 해도 머리가 곤두서고 가슴이 뛰고 소름이 끼치는 위험에 직면해서 신체의 개별 기관들은 주체의 지배를 벗어난다. 이런 기관들은 원초적인 자극에 자율적으로 순응한다.
반유대주의는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유대인은 터부시된 충동을 체제 순응적 이디오진크라지로 전화시키는 데 매우 적합한 존재였다. 종교적인 우상 금지에서 시작하여 광대나 집시를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것을 거쳐 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워지라고 가르치는 교육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지배자들이 그의 후예나 지배받는 대중에게 미메시스(모방·재현)적인 존재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은 문명의 조건이다.
반유대주의는 ‘잘못된 투사’ 위에 기초하고 있다. 미메시스가 주변 세계와 유사해지려고 한다면 잘못된 투사는 주변 세계를 자기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반영하기 위해 주체는 사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사물에 돌려줘야 한다. 주체는 세계가 감각 속에 남겨놓은 자취에 의해 다시 한번 외부 세계, 즉 다양한 속성과 상태를 지닌 사물의 통일성을 만들어낸다. 지각과 대상의 구별은 외부 세계를 자신의 의식 안에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과는 다른 무엇으로 인식하고 있는 주체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 때문에 ‘이성’의 활동인 반성 작용은 ‘의식적인 투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투사와는 달리 반유대주의의 투사는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주체가 객체로부터 받은 것을 객체에 되돌려줄 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주체 자신은 더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해진다. 주체는 외부와 내부로 향하는 두 방향 모두에서 반성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주체가 더이상 대상을 반성하지 않음으로써 주체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반성하지 않게 되며 그에 따라 분별하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 마치질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한 유대인 1982년 9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서쪽에 있는 사브라·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200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난민들 사이에 숨어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잔존 세력을 색출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핑계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무장 병력은 이미 2주 전 베이루트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여자와 노인, 어린이만 있던 난민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틀 동안 기독교 민병대들은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최소 1000명에서 최대 3000명이 사망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탱크로 난민촌을 포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스라엘군은 밤새도록 조명탄을 쏴 난민촌을 환하게 밝혔다. 피난민들을 죽이는 데 편리하도록 말이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근거지를 없애겠다며 레바논을 침공했고 기독교 정당인 팔랑헤당의 바시르 제마엘을 레바논 대통령으로 앉혔다. 그러나 그해 9월14일 제마엘은 시리아 정보기관이 사주한 테러로 폭사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팔랑헤당 무장 세력을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들여보냈다. 참혹한 현장 사진이 전세계로 보도됐다. 세계 각국은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간접 책임을 지고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사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였다. 관련자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학살 전범을 끝까지 추적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은 그냥 덮었다. 사브라·샤틸라 사건으로 샤론은 국방장관에서 물러났지만 되레 승승장구했다. 1999년 우익 리쿠드당의 당수가 됐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그 이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한 각종 폭압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별다를 바 없다. 팔레스타인 학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기 가운데의 ‘다윗의 별’을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로 바꿔 넣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나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인류 역사상 가장 존중받아야 할 희생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희생자가 가해자로 돌변할 때 그들에 대한 존중심은 유지될 수 없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야만성을 비판하면서 ‘반성’을 강조한다. “양심이란 바깥에 있는 실체를 위해 자아가 헌신하며 타인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곧,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와 내적인 상상력이 서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인 ‘반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파시즘의 희생자인 유대인들이 정작 팔레스타인을 또다른 타자로 취급하고 나치가 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학살의 피해자가 또다른 학살자가 되며, 그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반성이 가능할까?
■ 담금질 저소득자가 다문화에 배타적인 이유는?
“실질적인 소득이 적을 사람일수록 현명한 반성보다는 광적으로 반유대인 운동을 지지했다. 반유대주의는 고상한 상류 집단에 의해 지지되며, 하층민은 반유대주의를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행동대원이 된다. 반유대주의는 부지중에 빠져들게 된 문명의 의식이며 유대인 학살은 진정한 의식으로서의 살인 행위이다.”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말이다. 가난한 자가 자신을 가난하게 만든 세력이나 사회 구조가 아닌 또다른 피해자에게 증오를 품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 7월22일 노르웨이에서 테러를 저지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도 같은 사례다. 그는 이슬람 이민자들이 넘쳐나면서 노르웨이와 유럽의 정체성이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언사일 뿐 그 밑바탕에는 경제적 문제가 깔려 있다.
1960~70년대 초반까지는 전세계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서유럽은 노동력이 부족했고 이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한국이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던 것도 그때였다. 당시 서독은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3D 업종인 광산 인력을 구할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66년에 서독과 특별고용계약을 맺었고, 1977년까지 광부 7932명, 간호사 1만226명을 보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자본주의 고도성장기는 끝났다. 1980년대부터 영국의 마거릿 대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등 신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복지국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사회복지가 줄면 저소득층이 피해를 당한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진행되면 저임금·저숙련 노동자가 직격탄을 맞는다. 이들은 단순 기술만 있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이민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저소득층은 자신이 당한 피해를 신자유주의 정권 탓이 아니라 외국인 탓으로 돌렸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당신들이 고통을 받는 건 외국인 이민자 탓”이라고 부추기기도 했다. 서유럽에서 히틀러를 흠모하는 극우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때도 1980년대부터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문명 우월론은 이들의 행동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경제적 문제로 발생한 극우주의가 이슬람 이민자의 침공에 맞서 기독교 유럽을 지켜야 한다는 ‘위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포장된 것이다.
브레이비크의 학살 사건이 벌어지자 국내 다문화 반대 카페에서는 동조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들어온 건 1990년대부터 3D 업종을 한국인들이 기피하면서부터다. 중소기업들이 정부에 강력하게 외국인 노동자 수입을 요구했다. 그런데 한국도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한국인 저임금 노동자와 외국인 사이에 일자리를 놓고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다음 문장을 읽고 구체적 사례를 들어 그 의미를 설명하시오. (800자) 지식으로 전락한 사유는 중화되거나, 특수한 노동 시장에 쓰이는 단순한 전문 지식이 되거나, 개인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리하여 편집증에 대한 예방책이나 해독제로서 기능할 수 있는 정신의 자기 분별력은 해체되어버린다.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게 되면서 결국에는 ‘어설픈 교양’이 객관 정신으로 된다. 2. 다음 지문 2개를 비교해서 공통점을 분석하시오. 영화 <매트릭스>에서 어떤 장면이 이 두 지문의 공통점을 잘 설명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드시오. (1000자) ① 어떤 시민이 공산주의의 티켓을 선택하는가 파시즘의 티켓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붉은 군대나 서구의 실험실이 그들에게 가한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 권력 구조란 오직 수동적 대중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권력 구조가 대중에게 냉엄한 현실로 나타나도록 만드는 ‘물화’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 어떤 자발성이나 또는 사실의 진정한 모습을 단순히 상상하는 것마저 지나친 유토피아나 일탈적인 분파주의가 되어버린다. 가상은 너무나 치밀해서 그것을 꿰뚫어본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는 환각으로 여겨진다. <계몽의 변증법> ② 여기에서 플라톤이 하는 이야기는 흔히 ‘동굴의 알레고리’(동굴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자유로워진 네오의 상황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동굴 안의 수인들은 목과 손과 다리가 사슬로 묶여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러했던 그들에게 이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개념조차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을 지키는 간수들이 꼭두각시놀음이라도 하듯 동물 모양의 형체를 불 앞으로 지나가게 하면 수인들의 앞에 놓인 벽면에는 그것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이런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불빛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수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현실 이외의 다른 현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속박에서 풀려나 세상 밖으로 끌려 나온다. 그리고 사물의 실제 모습을 태양 빛 아래에서 보게 된다. 그 수인은 자기 혼자만 동굴 밖에 남아 있는 대신, 다시 동굴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믿는다. 그가 베푼 친절은 결국 조소와 저항으로 되돌아온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지음/김유동 옮김/문학과지성사 “계몽으로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는데, 그 이후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파시즘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스탈린주의라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저작 <계몽의 변증법>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것이다. 두 사람은 이성과 계몽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성과 계몽이 자연뿐 아니라 ‘제2의 자연’으로서 인간과 사회를 지배·관리하면서 파시즘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947년 초판이 나온 <계몽의 변증법>은 한때 잊혀진 책이었으나 되레 현재의 자본주의 분석에 더 유용해 보인다. 단, 분석은 정교하나 문제 해결 방안은 찾기 힘들다는 게 한계다.
■ 풀무질
예루살렘의 이슬람 황금사원 턱밑에 있는 통곡의 벽에서 한 유대인이 기도하고 있다. 조현 기자
■ 마치질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한 유대인 1982년 9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서쪽에 있는 사브라·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200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난민들 사이에 숨어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잔존 세력을 색출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핑계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무장 병력은 이미 2주 전 베이루트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여자와 노인, 어린이만 있던 난민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틀 동안 기독교 민병대들은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최소 1000명에서 최대 3000명이 사망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탱크로 난민촌을 포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스라엘군은 밤새도록 조명탄을 쏴 난민촌을 환하게 밝혔다. 피난민들을 죽이는 데 편리하도록 말이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근거지를 없애겠다며 레바논을 침공했고 기독교 정당인 팔랑헤당의 바시르 제마엘을 레바논 대통령으로 앉혔다. 그러나 그해 9월14일 제마엘은 시리아 정보기관이 사주한 테러로 폭사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팔랑헤당 무장 세력을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들여보냈다. 참혹한 현장 사진이 전세계로 보도됐다. 세계 각국은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간접 책임을 지고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사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였다. 관련자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학살 전범을 끝까지 추적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은 그냥 덮었다. 사브라·샤틸라 사건으로 샤론은 국방장관에서 물러났지만 되레 승승장구했다. 1999년 우익 리쿠드당의 당수가 됐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이스라엘 총리를 지냈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과 그 이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한 각종 폭압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별다를 바 없다. 팔레스타인 학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기 가운데의 ‘다윗의 별’을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갈고리 십자)로 바꿔 넣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나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인류 역사상 가장 존중받아야 할 희생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희생자가 가해자로 돌변할 때 그들에 대한 존중심은 유지될 수 없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야만성을 비판하면서 ‘반성’을 강조한다. “양심이란 바깥에 있는 실체를 위해 자아가 헌신하며 타인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곧,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와 내적인 상상력이 서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인 ‘반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파시즘의 희생자인 유대인들이 정작 팔레스타인을 또다른 타자로 취급하고 나치가 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학살의 피해자가 또다른 학살자가 되며, 그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반성이 가능할까?
■ 담금질 저소득자가 다문화에 배타적인 이유는?
산재를 당해 다리를 절단한 스리랑카 노동자. 김정효 기자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다음 문장을 읽고 구체적 사례를 들어 그 의미를 설명하시오. (800자) 지식으로 전락한 사유는 중화되거나, 특수한 노동 시장에 쓰이는 단순한 전문 지식이 되거나, 개인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리하여 편집증에 대한 예방책이나 해독제로서 기능할 수 있는 정신의 자기 분별력은 해체되어버린다.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게 되면서 결국에는 ‘어설픈 교양’이 객관 정신으로 된다. 2. 다음 지문 2개를 비교해서 공통점을 분석하시오. 영화 <매트릭스>에서 어떤 장면이 이 두 지문의 공통점을 잘 설명하는지 구체적 사례를 드시오. (1000자) ① 어떤 시민이 공산주의의 티켓을 선택하는가 파시즘의 티켓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붉은 군대나 서구의 실험실이 그들에게 가한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 권력 구조란 오직 수동적 대중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권력 구조가 대중에게 냉엄한 현실로 나타나도록 만드는 ‘물화’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 어떤 자발성이나 또는 사실의 진정한 모습을 단순히 상상하는 것마저 지나친 유토피아나 일탈적인 분파주의가 되어버린다. 가상은 너무나 치밀해서 그것을 꿰뚫어본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는 환각으로 여겨진다. <계몽의 변증법> ② 여기에서 플라톤이 하는 이야기는 흔히 ‘동굴의 알레고리’(동굴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자유로워진 네오의 상황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다. 동굴 안의 수인들은 목과 손과 다리가 사슬로 묶여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러했던 그들에게 이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개념조차 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을 지키는 간수들이 꼭두각시놀음이라도 하듯 동물 모양의 형체를 불 앞으로 지나가게 하면 수인들의 앞에 놓인 벽면에는 그것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이런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불빛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수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현실 이외의 다른 현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속박에서 풀려나 세상 밖으로 끌려 나온다. 그리고 사물의 실제 모습을 태양 빛 아래에서 보게 된다. 그 수인은 자기 혼자만 동굴 밖에 남아 있는 대신, 다시 동굴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믿는다. 그가 베푼 친절은 결국 조소와 저항으로 되돌아온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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