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의 교원 정년 단축에 따라 필자는 복직 1년 반 만인 1999년 8월 광주기계공고에서 정년퇴임하며 40년 가까운 교단생활을 마감했다.(왼쪽) 국회에서 교원노조 설립 관련 법이 제정된 뒤 99년 2월 전교조 광주지부에서 마련한 ‘전교조 합법화 감사의 밤’ 행사에 참석한 필자가 고 윤영규 초대 위원장 등과 함께 자축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101
1998년 9월 복직할 때 2년 반 남아 있던 나의 교단생활은 애초보다 1년6개월 짧아졌다. 교원 정년이 단축되었기 때문이었다. 복직할 당시만 해도 언론과 인터뷰할 때 ‘앞으로 남은 2년 반 동안의 교단생활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99년 1월 국회는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해 교원 정년을 65살에서 62살로 앞당겼다. 애초에는 60살까지로 낮추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재정부)가 처음 정년단축을 거론했을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구조조정 차원의 접근이었다. 그러나 교육의 전문성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교육계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62살로 조정되었다. 정년단축을 통해 젊고 활기찬 교단 분위기를 만들고 인건비를 줄여 교육환경 개선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이 정부가 밝힌 취지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학교 현장의 전교조 조합원들은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정년단축이 전교조 때문이라는 오해가 퍼져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이었던 이해찬 장관은 취임 직후 고교평준화 실시, 연합고사·보충수업·강제야간자율학습·모의고사 폐지 등 개혁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아울러 교원의 촌지 근절과 뇌물수수 집중단속 등 교직사회의 비리 근절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장관의 개혁정책은 현장의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성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교원정책과 관련해서는 교직사회를 부조리 집단으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정년단축 방침이 나오면서 교원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학교현장에서 일부 선생님들은 전교조 때문에 정년이 짧아졌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선생님들은 민주화운동에다 야당 의원 출신인 이 장관의 이력을 볼 때 교육정책에 관한 한 전교조와 긴밀하게 협의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사실 이 장관의 탈 입시위주 교육정책은 전교조가 줄곧 요구해온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특히 도서관에 대한 투자와 배려는 과거 정부와는 상당히 다른 정책을 세워 과감하게 운영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교육부와 전교조의 관계는 긴밀하지 못했고, 공식적인 만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현장의 선생님들은 전교조의 건의를 교육부가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장관은 장관대로 전교조가 교육부에 협조를 잘 안 해준다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광주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서 이 장관을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장관에게 당시 학교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관께서 정년단축 조처를 발표한 뒤 전교조 선생님들은 교무실에 들어가기가 힘들었어요. 전교조 때문에 단축되었다는 오해로 인해 쉬는 시간에 교무실 밖을 서성이다 수업에 들어가곤 했어요. 물론 사람이 바뀌어야 교육도 바뀐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교수들의 정년은 그대로 두면서 교사들만 단축시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었습니다. 교수들은 논문을 통해 학문연구 결과를 확인한다고 하지만 수업시간에 이론만 펼치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은 지식 전달은 물론이고 학생 생활까지 전반적인 지도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경험은 교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소양인데 젊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이유로 의견수렴이 부족한 상태에서 단축을 해버려 반발이 심했던 것이지요. 교육부의 무리한 정책에 전교조 현장 조합원들은 일선 선생님들의 볼멘소리에 가타부타 말도 못한 채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어요.”
그렇게 나는 99년 8월말 광주기계공고에서 교사생활을 마감했다. 61년 8월 수학교사로 발령받아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거의 40년 만이었다. 그해 1월 한 중앙일간지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또다시 아이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현직에 있을 때 전교조 합법화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그랬다. 학생들과 헤어짐은 무척 아쉬웠지만 합법화를 보고 떠나게 돼 너무나 가벼운 마음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는 98년 2월6일 ‘교원노조는 98년 정기국회에서 법을 개정하여 99년 7월부터 허용할 것’이라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우여곡절을 겪었다. 전교조와 민주노총은 노동조합법 개정을 통한 합법화를 주장했으나 정부는 특별법 제정을 통한 허용을 제안했다. 진통 끝에 정부 방안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98년 12월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통과를 거쳐 99년 1월6일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이어 7월1일 법이 발효되자 전교조는 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하고 합법화를 선언했다. 비합법 10년의 세월을 견디고 이룬 합법화였다. 나로서는 전교조가 합법화된 상태에서 퇴직할 수 있다는 것이 떳떳했고 유감없이 물러날 수 있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