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 김대중 정부는 국정 전반의 개혁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구로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제2건국위)를 출범시켰다. 1기 위원에 이어 이듬해 2기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필자(앞줄 맨 오른쪽)가 2002년 4월 개방된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역에서 상임위원들과 통일을 기원하며 함께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104
1998년 10월 김대중 정부는 국정 전반의 개혁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구로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제2건국위)를 출범시켰다. 전국의 인사 600여명이 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광주기계공고에 복직한 직후였던 나도 위원으로 위촉받았다. 청와대 초청 행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제2건국은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워 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독립운동을 한다는 자세로 제2건국위원들이 적극 활동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퇴직한 뒤인 2기 때는 45명의 상임위원 중 한명으로 활동했다. 상임위원 구성은 분야별·전공별 교수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정치인들은 거의 없었다. 김상근 목사께서 상임위원장을 맡았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와 장하진 당시 충남대 교수(전 여성부 장관)도 상임위원으로 함께했다.
상임위원 활동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한번은 회의 때 미래 세대를 지도하는 대학의 최고 책임자인 한 대학 총장의 발언에서 군부독재시절에 대한 향수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여전히 그릇된 시대인식이 자리잡고 있고, 더구나 최고 교육기관의 수장마저 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고 답답했다. 그 순간 리영희 선생의 “박정희 정권의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바로 설 수 없다”는 말씀이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박정희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간첩단 조작을 비롯해 개인과 지역에 마음대로 빨간색을 덧씌워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그로 인해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지역감정으로 인한 차별과 갈등을 겪었는가 말이다. 그 독재자의 후손이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현실은 참으로 딱한 일이다.
2002년 제2건국위 2기 상임위원들과 함께 금강산을 방문했다. 당시는 동해에서 금강산 앞바다의 장전항까지 유람선으로 이동하던 때다. 마침 ‘2002 월드컵’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동시에 열리던 시기였다. 북쪽 공연예술단의 환영행사 공연장에서 한국의 사상 첫 8강 진출 소식을 듣고 참가자들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금강산의 대표적 명소 중 한 곳인 구룡폭포를 올라갔다 올 때였다. 북한 안내원들이 곳곳에 서서 안내를 해주었다. 그중 한 여성 안내원은 ‘전교조 지도자문위원’이라는 내 명찰을 보고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나눈 뒤 버스정류장까지 함께 내려왔다. “선생님, 왜 남쪽에서는 통일에 대해 국민들이 소홀히 생각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느껴지는데요.” 안타까운 질문이었다. “소홀히 생각한다기보다 분단 상황에서 남한에는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는 등 미국과 관계가 유지되고 있지 않습니까. 철벽보다 두터운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다양한 사상과 철학, 견해가 존재하는 사회여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해주면 좋겠네요.” 덧붙여 “남쪽에서 오신 장기수 어른들 잘 계신가요? 결혼하신 분도 계시다던데…” 했더니 안내원 얼굴이 환해졌다. “잘 살고 계십니다. 결혼하신 분은 딸을 낳으셨는데 국방위원장께서 딸 이름을 ‘축복’이라고 지어줬어요.” 짧은 대화였지만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한 굉장한 관심 차이를 확인했다.
2001년 나란히 발족한 국가인권위원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국민들의 열망과 인권시민단체 등 진보진영의 결실이었기에 뿌듯했다. 박형규 목사가 초대 이사장을 맡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나는 이사로 참여했다. 배다지·성유보·이해동·함세웅·최영도·김용태·나병식·박정기·박정훈·안병욱·윤순녀·이경숙·조성우씨 등과 함께했다. 사업회 활동을 하면서 군부독재시절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김근태·김태홍 전 의원 등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떠올랐다. 김태홍 전 의원은 86년 ‘보도지침’을 월간 <말>에 폭로한 사건으로 구속과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또 한가지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지막 사형 집행은 97년 12월 말이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1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면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하는 기준에 따라 2007년 우리나라를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인정했다. 대한민국 국격을 높여주었던 한 예이다. 내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생명평화결사’에서도 2007년 12월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문화공연을 했다. 신부님과 수녀님, 목사님, 원불교 교무님, 스님 등 범종교인들과 가수 정태춘, 도종환 시인 등이 행사에 출연해 수고해 주었다. 그러나 2007년 대통령선거 때 유일하게 사형제도를 지지했던 이명박 후보가 집권한 이후 사형제도를 존속시키려는 시도가 계속돼 참으로 안타깝다. 2010년 헌법재판소의 사형제도 합헌 결정은 현 정권의 의도를 반영한 대표적인 예로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인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과 배치되는 결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고귀한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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