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왕의 일생>
49. 조선 국왕의 일생 - 500년 왕조의 힘은 어디서?
[난이도 수준 고2~고3]
[난이도 수준 고2~고3]
<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글항아리 조선의 임금은 평생 공부를 달고 살았다. 세자 때는 시험 부담도 상당했나 보다. 왕실 교육에서는 매일 수업이 끝날 때마다 쪽지시험을 보았다. 게다가, 매월 두 차례 있던 회강(會講)에서는 ‘종합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 자리에서 세자는 스승 20여명 앞에서 배운 내용을 ‘테스트’ 받았다. 먼저, 경전(經典) 구절이 적힌 대나무 쪽이 가득한 통이 놓인다. 세자는 거기서 문구 하나를 뽑아들고 읽고 뜻을 풀이해야 했다. 스승들은 성적을 적은 나무패를 쳐들었다. 흡족하면 ‘통’(通), 그런대로 내용을 채웠으면 ‘략’(略), 미흡하면 ‘조’(粗), 형편없으면 ‘불’(不)을 들었다. ‘A’, ‘B’, ‘C’, ‘F’로 점수를 매긴 셈이다. 왕이 되고 나서도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경연(經筵)은 왕의 필수의무였다. 경연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씩 열렸다. 경연을 게을리했다간 왕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실제로 연산군이 왕좌에서 밀려난 데는 경연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몫을 했다. 임금의 업무 강도 또한 가볍지 않았다. 왕의 일과는 회의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대규모 직원조회인 조참(朝參)과 약식 조회인 상참(常參), 국정보고 격인 윤대(輪對), 국무회의와 비슷한 차대(次對)에 이르기까지, 왕의 일과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 임금의 역할은 끝이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대법관, 국회의장의 일을 한 사람이 하는 꼴이다. 게다가 그는 ‘최고 제사장’이기도 했다. 임금은 크고 작은 제사도 떠받들어야 했다. 종묘에서 치러지는 제사만 1년에 다섯 번이었다. 여기다 사직단, 영녕전(永寧殿) 제사까지, 임금이 챙겨야 할 자리는 한없이 많았다. 왕의 일상은 어땠을까? 왕은 혼자 있는 틈이 거의 없다. 심지어 왕의 잠자리도 정(井)자 모양으로 방들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 방에서는 나이 많은 궁녀들이 왕을 지키며 밤을 지새웠다. 이 때문에 왕은 왕비와의 잠자리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식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법(法)보다 예(禮)를 앞세웠던 나라다. 법은 잘못을 다스리기 위해서 있다. 그러나 예는 아예 허물이 쌓이지 못하도록 막는다. 예의를 제대로 지키면 서로 부딪힐 일 자체가 없지 않던가.
이런 논리는 음식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약은 병을 고치는 데 쓴다. 반면 좋은 음식은 아예 병이 나지 않게 막는다. 그래서 왕은 음식도 가려 먹어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무척 미워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한 덩치 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세자의 뚱뚱한 몸은 ‘자기관리도 못한다’는 인상을 주고도 남았다. 게다가 왕의 모든 행동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사관(史官)들은 어디에나 따라붙었다. 요새로 치면 시시티브이(CCTV)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왜 조선은 왕을 이토록 힘들게 했을까? 임금은 또 이렇듯 혹독한 삶을 왜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조선 임금의 강력한 권력에서 찾는다. 조선의 왕은 군사에서 행정, 재판,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권력자도 조선의 임금 같은 힘을 누리지는 못했다. 반면 독재를 막는 조선의 ‘정치 시스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조선의 국가철학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이에 따르면, 지도자는 무엇보다 덕(德)을 갖추어야 한다. 힘으로만 다스리려는 임금은 쿠데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언제든 끌어내려도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군주들은 덕을 쌓으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뿐 아니다. 왕은 정치를 밀실에서 할 수 없었다. 공식적인 논의는 반드시 ‘편전’(便殿)에서 해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집무실에서 모두가 듣는 가운데 논의를 해야 했던 식이다. 게다가 왕의 모든 말과 행동은 기록으로 남았다. 감시받는 권력은 딴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처럼 조선의 권력 시스템은 ‘교육’과 ‘기록’으로 강력한 왕권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왕의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이 꼭 불리하지만은 않았다. 조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세종과 영조, 정조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하나같이 학문에 뛰어났던 임금들이었다. 경연에서 신하들은 왕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녔다. 왕의 학식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학문과 덕을 쌓은 임금, 즉 군사(君師)를 모범으로 꼽는다. 학식이 뛰어난 왕은 그만큼 권력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엄격한 궁중 절차와 예법도 왕의 권위를 한껏 높였다. 여느 왕조들은 왕의 권위를 ‘핏줄’에서 찾았다. 예컨대 당(唐) 나라 황제들은 자신들이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떠벌렸다. 송(宋)의 황제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도교의 원시천존이 자신의 조상이라 부르짖었다. 신라도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권력의 근거를 찾지 않았던가.
그러나 조선의 왕권은 철저하게 ‘실력’에서 나왔다. 왕은 고귀한 핏줄 때문이 아니라, 열심히 덕과 실력을 쌓았기에 존경을 받았다. 500년 넘게 이어진 조선왕조의 저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점에서 조선은 현대의 ‘조선’과 비교가 된다.(북한의 공식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김일성은 자기 권력의 뿌리를 ‘항일운동’에서 찾았다. 반면 김정일과 김정은의 힘은 김일성의 아들과 손자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권력의 근거가 실력에서 핏줄로 바뀐 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자인 김한솔이 보스니아의 한 칼리지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북쪽 나라는 이미 왕조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들도 이제 조선의 왕손 교육을 흉내 내려는 게 아닐까?
안광복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글항아리 조선의 임금은 평생 공부를 달고 살았다. 세자 때는 시험 부담도 상당했나 보다. 왕실 교육에서는 매일 수업이 끝날 때마다 쪽지시험을 보았다. 게다가, 매월 두 차례 있던 회강(會講)에서는 ‘종합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 자리에서 세자는 스승 20여명 앞에서 배운 내용을 ‘테스트’ 받았다. 먼저, 경전(經典) 구절이 적힌 대나무 쪽이 가득한 통이 놓인다. 세자는 거기서 문구 하나를 뽑아들고 읽고 뜻을 풀이해야 했다. 스승들은 성적을 적은 나무패를 쳐들었다. 흡족하면 ‘통’(通), 그런대로 내용을 채웠으면 ‘략’(略), 미흡하면 ‘조’(粗), 형편없으면 ‘불’(不)을 들었다. ‘A’, ‘B’, ‘C’, ‘F’로 점수를 매긴 셈이다. 왕이 되고 나서도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경연(經筵)은 왕의 필수의무였다. 경연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씩 열렸다. 경연을 게을리했다간 왕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실제로 연산군이 왕좌에서 밀려난 데는 경연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몫을 했다. 임금의 업무 강도 또한 가볍지 않았다. 왕의 일과는 회의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대규모 직원조회인 조참(朝參)과 약식 조회인 상참(常參), 국정보고 격인 윤대(輪對), 국무회의와 비슷한 차대(次對)에 이르기까지, 왕의 일과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조선 시대 임금의 역할은 끝이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대법관, 국회의장의 일을 한 사람이 하는 꼴이다. 게다가 그는 ‘최고 제사장’이기도 했다. 임금은 크고 작은 제사도 떠받들어야 했다. 종묘에서 치러지는 제사만 1년에 다섯 번이었다. 여기다 사직단, 영녕전(永寧殿) 제사까지, 임금이 챙겨야 할 자리는 한없이 많았다. 왕의 일상은 어땠을까? 왕은 혼자 있는 틈이 거의 없다. 심지어 왕의 잠자리도 정(井)자 모양으로 방들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 방에서는 나이 많은 궁녀들이 왕을 지키며 밤을 지새웠다. 이 때문에 왕은 왕비와의 잠자리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식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법(法)보다 예(禮)를 앞세웠던 나라다. 법은 잘못을 다스리기 위해서 있다. 그러나 예는 아예 허물이 쌓이지 못하도록 막는다. 예의를 제대로 지키면 서로 부딪힐 일 자체가 없지 않던가.
이런 논리는 음식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약은 병을 고치는 데 쓴다. 반면 좋은 음식은 아예 병이 나지 않게 막는다. 그래서 왕은 음식도 가려 먹어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무척 미워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한 덩치 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세자의 뚱뚱한 몸은 ‘자기관리도 못한다’는 인상을 주고도 남았다. 게다가 왕의 모든 행동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사관(史官)들은 어디에나 따라붙었다. 요새로 치면 시시티브이(CCTV)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왜 조선은 왕을 이토록 힘들게 했을까? 임금은 또 이렇듯 혹독한 삶을 왜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학자들은 그 이유를 조선 임금의 강력한 권력에서 찾는다. 조선의 왕은 군사에서 행정, 재판,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권력자도 조선의 임금 같은 힘을 누리지는 못했다. 반면 독재를 막는 조선의 ‘정치 시스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조선의 국가철학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이에 따르면, 지도자는 무엇보다 덕(德)을 갖추어야 한다. 힘으로만 다스리려는 임금은 쿠데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언제든 끌어내려도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군주들은 덕을 쌓으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뿐 아니다. 왕은 정치를 밀실에서 할 수 없었다. 공식적인 논의는 반드시 ‘편전’(便殿)에서 해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집무실에서 모두가 듣는 가운데 논의를 해야 했던 식이다. 게다가 왕의 모든 말과 행동은 기록으로 남았다. 감시받는 권력은 딴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처럼 조선의 권력 시스템은 ‘교육’과 ‘기록’으로 강력한 왕권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왕의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이 꼭 불리하지만은 않았다. 조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세종과 영조, 정조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하나같이 학문에 뛰어났던 임금들이었다. 경연에서 신하들은 왕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녔다. 왕의 학식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학문과 덕을 쌓은 임금, 즉 군사(君師)를 모범으로 꼽는다. 학식이 뛰어난 왕은 그만큼 권력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엄격한 궁중 절차와 예법도 왕의 권위를 한껏 높였다. 여느 왕조들은 왕의 권위를 ‘핏줄’에서 찾았다. 예컨대 당(唐) 나라 황제들은 자신들이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떠벌렸다. 송(宋)의 황제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도교의 원시천존이 자신의 조상이라 부르짖었다. 신라도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권력의 근거를 찾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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