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다국적 기업가들은 유목민이다?

등록 2011-11-07 16:21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ㅣ
52.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 현대자본주의의 본질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칭기즈칸의 정복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차지한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항복했건, 그러지 않았건 상관이 없었다. 칸의 군대가 지나간 뒤, 마을은 풀이 무성한 초원으로 바뀌었다.

칭기즈칸에게는 도시를 키워 사람을 모으고 세금을 거둔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왜 그랬을까? 칭기즈칸에게는 오직 ‘풀밭’만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말을 키울 너른 목초지 말이다.

우리에게 칭기즈칸의 바람은 어처구니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목민의 처지에서는 별스러울 것도 없다. 유목민이 도시를 차지해서 뭐하겠는가. 그들은 어차피 도시에서 살려 하지 않는다. 도시는 정착민들에게만 좋은 곳이다. 마을을 살려두면 정착민들이 꾀어들 것이다. 그리고 ‘복수’를 꿈꿀 테다. 그러니 차라리 없애버리는 쪽이 낫다. 이렇듯, 세상은 어떤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프랑스의 지식인 자크 아탈리는 유목민, 즉 노마드(nomad) 처지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정착민들은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우리는 정착민들만 역사를 꾸려왔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역사의 대부분은 유목민들의 몫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진시황은 누구 때문에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로마를 무너뜨린 이들은 누구였던가? 정착민들의 나라 밖에는 힘세고 거대한 유목민의 제국이 있었다.

유목민들은 끊임없이 정착민을 위협했다. 이 점은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시대, 지구 전체는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 이 속에서 정착민 문화는 설 곳이 없다. 평생 안착할 고장, 뿌리 튼튼한 직장은 스러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유목민처럼 먹거리와 살 곳을 찾아 떠돌아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들도 자신에게 유리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세금이 싸고, 임금도 낮은 지역으로 말이다. 그럴수록 복지국가들은 하릴없이 무너진다. 유럽만 해도 그렇다. 유럽의 부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복지제도를 꾸려가기 위해서다. 소득이 많은 엘리트들은 불만이 많겠다. 그래서 이들은 세금을 덜 내는 나라로 옮겨가곤 한다. 산업 인재들이 미국으로 모여드는 이유다.

돈 낼 이들이 떠난 상황에서 복지는 어떻게 될까? 학교, 병원 등 국가가 해주던 서비스들은 시장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능력껏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다. 당연히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테다. 그러면 국가는 기업에 구걸을 한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테니, 제발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벌이라고 말이다.

기업들은 규제를 풀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세금도 깎아달라고 큰소리친다. 국가가 부탁을 안 들어준다고? 이럴 때 기업은 다른 나라로 떠나면 그만이다. 아쉬운 쪽은 국가다. 그래서 나라는 ‘기업 프렌들리’한 정책들을 쏟아낸다. 국가는 전 세계에서 사업을 펼치는 다국적 기업에 무력하기만 하다. 이럴 때 시민들의 삶은 어떻게 될까?

기업은 더 좋은 시장을 찾아 이동한다. 노동자들도 똑같다. 노동자들은 살기 좋은 곳이 아닌, 시장이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있는 곳은 어디든 가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을 끌어들이고 일자리를 만드는 경쟁 속에, 노동자들을 지켜주던 복지제도들은 하나둘씩 무너져 간다.

줄어든 복지제도는 독재를 낳기도 한다. 빠듯한 나라 살림, 모든 이에게 복지 혜택이 돌아가기란 턱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 국가의 도움은 누구에게 가게 될까? 국가에 고분고분한 이들에게 돌아가기 쉽다. 나라의 도움을 받으려면 자신의 개인정보와 처지를 투명하게 국가에 드러내야 한다. 또한 각종 조사와 지시에 순순히 따라야 한다. 국가가 미끼를 쥐고 시민들을 길들이는 꼴이다.

그렇다면 세계화 시대, 유목민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은 지옥이기만 할까? 아탈리에 따르면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그는 이슬람이 널리 퍼지는 모습을 눈여겨본다. 이슬람 인구는 2020년까지,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나리라고 한다. 세계 인구의 23%에 이르는 수준이다.

왜 이렇듯 이슬람은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아탈리는 ‘시장이 주지 못하는 것’을 안겨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장은 자선과 박애, 연대의식 등등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 시장에서는 모든 관계가 ‘계약’으로 맺어진다. 이익이 있으면 뭉쳤다가, 원하는 바를 얻으면 흩어지는 식이다. 이런 논리로 사는 세상은 외롭고 잔인한 곳이다.

이슬람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하나로 힘을 모으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슬람’이라는 가치 아래, 시장의 황량함을 넘어서려는 셈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1인 1표’를 앞세우며 전 세계 사람들은 억압에 맞서자며 손을 잡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자유무역협정은 무역장벽이 사라지고 기업 활동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소리 높인다. 그래야 소득이 많아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진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잘된다고 해서, 우리 삶도 좋아진다고 할 수 있을까? 기업은 이미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선 지 오래다. 다국적 기업들이 거둘 엄청난 이익이 국민에게 돌아가리라는 법은 없다.

유목민들은 목초지가 황폐해지면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난다. 다국적 기업도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한때 사업장이었던 곳’과 ‘앞으로 사업장일 곳’이 있을 뿐이다. 이익을 다 챙긴 기업은 세금과 복지 등 사회적 의무를 내버려둔 채 유유히 떠날지 모른다. 그런데도 자유무역협정은 이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외친다. 국민을 설득하려면, 자유무역협정이 기업이 아닌 국민에게 이롭다는 점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