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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유엔군 전투기 정찰 틈타 빨치산 납치 대열서 탈출 / 박정기

등록 2011-12-12 20:06

1953년 6월 해인사를 점령한 빨치산에게 초모당해 가야산 속으로 끌려가던 박정기는 유엔군의 정찰을 피하느라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거창 쪽으로 도망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진은 한국전쟁 초기 피난길에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참상.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중에서
1953년 6월 해인사를 점령한 빨치산에게 초모당해 가야산 속으로 끌려가던 박정기는 유엔군의 정찰을 피하느라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거창 쪽으로 도망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진은 한국전쟁 초기 피난길에 전투기의 무차별 기총소사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참상.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중에서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⑥
1953년 6월말 해인사를 점령한 빨치산에 끌려가던 박정기는 멀리서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엔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위로가 되었다. 빨치산 대원 한명이 동행한 교수와 고등학생 등을 호명했다. 그들에게 몇 마디 주의를 주더니 하산을 명했다. 하산하는 이들을 보니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대열이 다시 출발했다.

몇 채의 인가가 보였다. 산골 마을 뒤로 작은 논배미들이 모여 있었다. 논두렁을 밟으며 걸었다. 개 짖는 소리가 나던 마을이었다. 화약 냄새를 맡은 개들이 소리를 죽였다. 포수가 지나가면 개가 꼬리를 내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대열은 다시 산으로 접어들었다. 밤을 새워 산골에서 산골로 행군했다. 능선을 타고 계곡을 지났다. 동이 트고 햇빛이 밝아졌다.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대열이 있는 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박정기는 덜컥 겁이 났다. ‘이를 어쩐다? 발견했다 하믄 기관총을 난사하고 포탄을 투하할 낀데 그땐 다 죽는 기다.’

피난민들이 비행기의 공격으로 비명횡사한 이야기는 전쟁 와중에 숱하게 들었다. 빨치산과 연행자를 구분해 사격할 리 만무했다. 멀리서 비행기는 날아오는데 도망갈 틈을 찾을 수 없었다. 비행기는 다행히 대열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행기 소리가 잦아들자 대열은 다시 출발했다.

밤이슬이 옷에 배어 축축했다. 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내디뎠다. 다리가 풀리면서 어지러웠다. 박정기는 픽 하고 쓰러졌다. 대열이 멈추었다. 의무병이 찾아와 몸에 청진기를 댔다. 몸이 뜨거웠다. “열사병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빨치산이 박정기의 짐을 가져갔다. 짐이 떠나니 몸이 가뿐해졌다. 이제 살길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무겁긴 했지만 일부러 꾀를 내어 쓰러진 것이다. 대열이 다시 움직였다. 골짜기를 타고 능선에 다다랐다.

짐을 벗어 몸이 가뿐해진 박정기는 탈출을 모색했다. 계산해보니 대열의 앞머리에서 꽁무니까지 족히 200미터가 넘는 거리였다. 연행자 사이사이에 빨치산이 배치되었다. 정덕기가 박정기의 바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비행기가 정찰하는 상황이라 대열에서 이탈한다 해도 총을 쏘기는 어려울 것이다. 총성이 들리면 위치를 드러내 기습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기는 거리와 시간을 계산했다. 앞사람과의 거리가 10미터였다. 탈출하는 상상을 했다. 총만 쏘지 않는다면….


미군이나 국군들과 달리 빨치산들은 양민을 학살하지 않는다고들 했다. 어떤 확신이 다가왔다. 서서히 걸음 속도를 늦췄다. 앞사람과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정덕기와는 서서히 좁혀졌다. 시간은 오후 3시경. 능선에서 내려와 산허리로 돌아들 때였다. 박정기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핀 뒤 잽싸게 대열에서 이탈했다. 쏜살같이 달렸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었다.

골짜기를 향해 내리막길을 달렸다. 한참 뛰다 뒤를 돌아보니 정덕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숲을 헤치며 한참을 더 달린 뒤 걸음을 멈췄다. 넝쿨 숲이 가로막고 있었다. 숲에 들어선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추적을 포기한 것일까?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는 정덕기를 이끌고 넝쿨 숲속에 머리를 박은 채 몸을 숨겼다. 새소리 말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가빴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위를 살폈다. 자신이 선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맞은편 산으로 이동했다. 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방향을 보고 방위를 어림잡았다. 거창 어디쯤인 것 같았다. 멀리 초가집 몇 채와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두 사람은 인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집 앞 밭둑에서 노부부가 아편을 채취하고 있었다. 허리를 편 노인들이 낯선 이들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뉘시오?” “해인대 학생입니데이. 어제 빨치산에 납치되었다 도망쳐 나왔십니더.”

박정기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살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신발 한쪽이 없었다. 정덕기는 아예 신발 양쪽을 다 잃어버렸다. 노부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꽁보리밥을 차려주었다. 그 집을 나선 두 사람은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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