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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40년뒤 비전향장기수로 다시 만난 빨치산 함세환씨 / 박정기

등록 2011-12-13 19:40

2000년 9월2일 함세환(맨 왼쪽)씨를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전쟁 말기 해인사에서 박정기 등을 납치했던 빨치산 초모대원이었던 함씨는 92년 유가협을 찾아와 서로 재회했다.  사진 <한국정책방송> 갈무리
2000년 9월2일 함세환(맨 왼쪽)씨를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전쟁 말기 해인사에서 박정기 등을 납치했던 빨치산 초모대원이었던 함씨는 92년 유가협을 찾아와 서로 재회했다. 사진 <한국정책방송> 갈무리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⑦
가야산을 넘어 거창 쪽 어느 외딴 노부부의 집을 나선 박정기 일행이 도착한 마을엔 임시 지서가 있었다. 작은 산골마을에 지서 외에도 여러 기관이 들어와 있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정보원도 여럿 있었다. 박정기와 정덕기는 지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이 빨치산 부대의 인원과 행군 방향 등을 캐물었다. 의도적인 입산이 아니었는지 추궁했다. 마침 경찰관 중에 고향 월평마을 후배가 있었다. 그가 신분을 증명해주었다. 빨치산들이 산에서 일찍 돌려보냈던 교수와 고교생 등은 오히려 지서에서 고초를 겪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지서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해인사로 돌아왔다. 경찰들이 해인사 주변을 경비하고 있었다. 박정기는 절에 도착하자마자 보따리를 찾았다. 돌다리 밑에 던져둔 보따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공부한 것이 물거품이 된 것처럼 허탈했다. 그는 뒤늦게 다시 부산 집으로 향했다.

박정기는 그때를 회상할 때면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종가의 종손으로 임무를 다한 기지. 만약 그때 끌려갔으믄 우리 집안은 끝난 기야. 내는 내 할 일을 다 했어.”

당시 함께 연행된 사람들의 생사는 내내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을 연행했던 빨치산 한 명을 우연히 만났다. 1992년 여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한울삶(서울 동대문 유가협의 사무실)을 방문한 어느 비전향 장기수와 얘기를 나누던 박정기는 그가 해인사에서 자신을 납치했던 그 빨치산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뒤 정황이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장기수의 이름은 함세환이었다.

함세환은 1950년 7월 열아홉의 나이로 의용군에 자진 입대했다. 그 후 빨치산에 편입되어 활동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친 빨치산 활동으로 12발의 총알을 맞았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중 하나의 카빈 총알은 그때까지 뱃속에 박혀 있었다. 함세환은 박정기가 대열에서 탈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충청북도 괴산의 속리산 하간평에서 네 발의 총에 맞고 사로잡혔다. 휘하의 부하 네 명은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그는 재판에서 나이가 어린 점이 고려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감옥에서 34년을 복역한 다음 장기수로 출소했다.

함세환은 박정기를 납치한 일을 빨치산 용어로 ‘초모’라고 일러줬다. 초모로 입산한 이들에겐 빨치산 활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일정한 사상교육을 통해 입대를 권유했다.

그날 두 사람은 오랜 지기처럼 마음을 터놓고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빨치산과 연행자로 만난 두 사람은 세월이 흘러 한 사람은 민주화운동가가 되어 있었고, 한 사람은 비전향 장기수가 되어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제2의 이인모’로 알려진 함세환은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9월 63명의 장기수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북으로 간 그는 40대 여성과 결혼해 슬하에 딸을 두었다. 그가 칠순의 나이에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기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축하의 말을 전할 길은 없었다.


1953년 7월27일 마침내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정전협정은 그 후 평화협정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한반도는 58년째 전쟁이 일시 중단된 땅이 되었다.

그 무렵 해인대학은 교정을 진주로 옮겼다. 박정기는 진주에서 2학기를 마치고 중퇴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데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생긴 두 동생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전쟁이 끝난 뒤 거리엔 실업자가 넘쳐났다. 일자리 잡기가 여의치 않았다. 우연히 부산시청의 지인을 통해 공무원 공채 소식을 듣고 응시했다. 54년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로 부산시 수도국 7급 공무원이 되었다. 36년 공무원 생활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박정기는 주로 수도 파이프 매설작업 현장과 양수장의 가압장에서 일했다. 24시간 교대제라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는 2년 뒤인 56년 친척의 중매로 만난 정차순과 결혼했다.

박정기는 아내 정차순을 ‘큰 언덕’에 비유했다.

“나는 아내를 큰 언덕처럼 믿는다. 황소는 무기로 가진 게 꼬리밖에 없다. 귀찮게시리 파리가 달라붙어도 꼬리밖에 쓸 수가 없다. 온몸이 가려우면 잔등을 언덕에 대고 마구 비비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황소에게 언덕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황소는 박정기이고, 언덕은 정차순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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