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3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이 쓴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관 축소·은폐’ 비밀편지의 원본. 안유 보안계장의 제보를 토대로 작성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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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3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보안계장 안유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이부영은 한재동 교도관에게 볼펜과 종이를 요청했다. 한재동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볼펜과 근무용지인 ‘보고전’ 몇 장을 제공했다. 수감자들에게 필기도구조차 금지된 때였다. 이부영은 3통의 편지를 써서 “박종철 사건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며 건네주었다. 한재동은 편지를 교도소 밖으로 가지고 나가 전직 동료 교도관 전병용에게 전달했다. 그는 당시 수배상태였던 전병용과 연락하고 지내고 있었다.
한재동은 영등포교도소 안에 있는 철공장의 재소자들을 관리·감독하는 일을 했다. 철공장에선 재소자들이 수갑 등을 만들었다. 일을 마치는 오후 5시부터 퇴근시간인 6시까지 그는 매일 이부영을 만나 바깥소식을 전해주었다.
‘민주 교도관’으로서 한재동의 활약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5·3 인천항쟁을 비롯한 주요한 시위가 있을 때마다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70년 대전교도소에서 근무할 때 동료 교도관을 통해 우연히 <씨알의 소리> 창간호를 읽었다.
“동료가 어느 날 씨알의 소리라는 작은 책자를 책상 위에 두면서 ‘너도 읽어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탐독하며 역사의식을 갖게 됐어요.”
그 후 교도소에서 조영래·김대중·함세웅 등을 만나며 감옥 안과 바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했다. 77년 무렵엔 박정희 유신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모임에 비밀리에 가담했다. 교도관 신분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일들이었다. 이부영이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던 것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그의 실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한재동은 내부 제보자가 안유 보안계장일 거라고 추측만 했다. “서로 물어보지 않았어요. 알면 위험하니까요.”
그는 6월항쟁 동안 내내 거리에서 살다시피 하며 시위대와 함께했다.
감옥 안에서 한재동을 통해 바깥소식을 접하고 있던 이부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접한 뒤 항의투쟁을 벌여왔다. 2월7일 추도대회와 3월3일 49재 땐 단식으로 항의했다. 어느 날 고문경관 두 명이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 애초 여성 재소자들을 수감하는 여사동이었는데, 죄수들을 다른 교도소로 모두 내보낸 뒤 두 경관이 들어왔다. 마침 같은 사동에 배치된 이부영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조한경, 강진규. 당신들은 이제라도 박종철의 명복을 비십시오. 반성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일방적인 외침이라 그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토요일에 두 사람이 면회를 다녀온 뒤면 강진규는 흐느껴 울었고, 나중에 교회 장로가 된 조한경은 찬송가를 불렀다. 이부영은 자신이 한 말을 듣고 우는 것인지, 면회를 다녀온 일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유에게 면회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을 땐 그도 깜짝 놀랐다. 편지를 밖으로 내보낸 뒤 그가 말했다. “안형, 나와 면회한 기록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언제 내부 수사를 통해 역추적이 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흔적을 모두 없애야 했다. 편지가 그의 손을 떠난 이후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한재동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전병용은 전에 이부영을 숨겨준 혐의로 수배중이었다. 그는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김정남도 수배중인 상태였다. 전병용은 편지를 전달한 이틀 뒤 검거되었다. 이부영은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찔했죠. 며칠만 먼저 체포됐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더 좌불안석이 됐죠. 여러차례 옥살이를 했지만 그때처럼 힘든 때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 이후 틈날 때마다 안유가 신문을 가져와서 보여줬고, 한재동이 바깥소식을 전해줬다. 그는 6·29 선언이 나온 뒤에야 안심했다.
김정남은 애초 야당 국회의원을 통해 임시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때 폭로하는 방안을 생각했지만 의원의 고사로 시간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는 고민 끝에 사제단에 발표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3월 중순에 건네받은 3통의 편지는 ‘5·18’ 며칠 전에야 함세웅 신부에게 건네졌다.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 황국자와 딸 고은영이 편지를 전달한 메신저였다.
언론은 성명서 내용을 대서특필하며 연일 보도했다. 이틀 뒤 검찰은 사건을 축소·조작한 사실을 인정하고 재수사를 시작했다. 5월26일 오전 정부는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사흘 뒤 사건을 맡은 대검 중앙수사본부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재수사 결과 물고문에 앞서 고문경찰관들이 박군을 조사할 때 가슴을 때리는 등 상당한 구타가 있었음이 입증됐다. … 그러나 물고문 이외 전기고문한 사실은 없다.”
박정기는 전기고문이 없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전 국민에게 거짓말이 들통난 정부였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조한경, 강진규. 당신들은 이제라도 박종철의 명복을 비십시오. 반성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일방적인 외침이라 그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토요일에 두 사람이 면회를 다녀온 뒤면 강진규는 흐느껴 울었고, 나중에 교회 장로가 된 조한경은 찬송가를 불렀다. 이부영은 자신이 한 말을 듣고 우는 것인지, 면회를 다녀온 일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유에게 면회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을 땐 그도 깜짝 놀랐다. 편지를 밖으로 내보낸 뒤 그가 말했다. “안형, 나와 면회한 기록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언제 내부 수사를 통해 역추적이 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흔적을 모두 없애야 했다. 편지가 그의 손을 떠난 이후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한재동에게 편지를 전달받은 전병용은 전에 이부영을 숨겨준 혐의로 수배중이었다. 그는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김정남도 수배중인 상태였다. 전병용은 편지를 전달한 이틀 뒤 검거되었다. 이부영은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찔했죠. 며칠만 먼저 체포됐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더 좌불안석이 됐죠. 여러차례 옥살이를 했지만 그때처럼 힘든 때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 이후 틈날 때마다 안유가 신문을 가져와서 보여줬고, 한재동이 바깥소식을 전해줬다. 그는 6·29 선언이 나온 뒤에야 안심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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