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2월20일 경찰의 수배에 쫓기다 스스로 목을 맨 서울교대 박선영 학생의 어머니 오영자씨가 ‘5·18 부활제’에서 딸의 영정사진을 껴안은 채 오열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후 딸 대신 투사로 나선 오씨가 2001년 4월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사 앞에서 ‘안티조선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오른쪽 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59
1988년 11월14일 오전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미 대사관 사제폭발물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산하 ‘민중생존권 쟁취와 광주학살 주범 미국·청와대 독재 처단을 위한 학생투쟁연합’ 소속의 애국청년결사대원 7명이 구호를 외치며 등장했다. 박용익의 어머니를 비롯해 민가협과 유가협 어머니들로 채워진 방청석에서는 박수를 쳤다. 학생들은 모두 재판을 거부했다. 재판부는 이들을 퇴정시킨 뒤 징역 1년6개월~2년을 선고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오영자(박선영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가슴에 품은 딸의 사진을 꺼내 목에 걸었다. 의문사 유가족들이 어딜 가든 지니고 다니는 자식의 영정사진이었다. 오영자는 자나 깨나 사진을 옷 속에 품고 다녔다. 그가 판사를 향해 말했다.
“양심수에게 실형이 웬말이냐? 학생들이 아닌 전두환과 이순자를 감옥에 집어넣어라!”
법정에 온 7명의 유가족들도 항의했다. 판사가 오영자를 향해 소리쳤다.
“너 나와!”
오영자는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가 법대 앞에 섰다.
“나오라고 했으믄 말해보시오! 살인마는 내비두고 왜 죄 없는 우리 학생들에게 실형을 때립니까?”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판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판사가 황급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오영자는 마이크와 의자를 내던지고, 판결문과 재판 기록을 갈기갈기 찢었다.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방청객들이 빠져나갔다. 재판은 휴정되었다. 오영자와 유가족들은 법정에서 버티며 학생들이 피고인으로 참가하는 다음 재판을 기다렸다. 오영자는 그때 판사를 놓친 일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회고했다.
“판사놈 쥑일라고 쫓아갔지요. 근디 구녁으로 사라져부렀어. 난 죽을라고 했어요. 데모하다 죽는 게 내 소원이였으니께. 그냥은 못 죽겠어요. 마르고 닳도록 기른 우리 선영이 생각하믄 너무 원통해.”
한 시간쯤 뒤 경찰이 출동해 오영자·임분이·허영춘·이계남 등 유가족을 한명씩 끌고 나갔다. 이들은 경찰차에 실려 난지도로 향했다. 난지도에 거의 도착할 즈음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 “남대문경찰서로 데리고 와!” 7명의 유가족이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박정기는 재판에 참여한 유가족이 전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는 경찰 책임자에게 요구했다. “어무이들 다 내놓그라. 안 그라믄 게서 다 죽을 끼다.” 하지만 경찰서에서는 현행범이라며 면회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경찰이 오영자를 끌고 수사과로 향했다. 오영자가 버티자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그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년이 질로 쎈 년이네. 독종이구만. 나한테 맛 좀 봐라.” 끌려가는 도중 온몸에 멍이 들었다. 다른 유가족들도 모두 조사를 받았다. 서로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임분이가 조사 도중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내가 했다. 그깟 서류 좀 찢으면 어떻나? 화장지만도 못한 판결문 찢으면 어떻나?” 실제 판결문이나 서류에 손도 대지 않았던 임분이는 이 말 때문에 8개월의 실형을 받게 된다. 유가족들은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고 몸싸움을 벌였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박정기가 말했다. “우리는 저 안에 갇힌 사람들과 한 운명입니더. 모두 풀려날 때까지 여기서 물러날 수 없습니더.” 그는 남대문경찰서 정문 옆 너른 처마 아래서 노숙농성을 하자고 제안했다. 유가족들은 종이상자와 신문지를 땅바닥에 깔고 농성을 준비했다. 유치장에 갇힌 유가족들도 신발을 벗어 마룻바닥을 두드리고 구호를 외치며 밤샘농성을 벌였다. 다음날 남대문경찰서는 유가족 전원에게 면회를 허용했다. 오영자·임분이는 일반 피의자들과 달리 별도의 건물에 수감되어 있었다. 박정기는 계단을 따라 지하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감방이 두 개였는데 한 곳엔 오영자, 한 곳엔 임분이가 갇혀 있었다. 박정기는 유치장 풍경에 아연실색했다. 바닥은 발목 위까지 물이 차 있었다. 오영자는 무언가를 뭉치더니 갑자기 유치장을 지키는 경찰들을 향해 내던졌다. 변기에 누운 똥과 오줌, 사식으로 제공된 밥을 섞어 만든 ‘똥오줌밥’이었다. 똥오줌밥 여러 개를 만든 그는 하나씩 던지며 소리쳤다.
“느그들이 준 드러운 밥 안 먹는다. 느그들이나 처묵어라.”
일명 ‘빵투’였다. 오영자는 전날 유치장에 끌려온 뒤부터 이렇게 빵투를 벌이고 있었다. 변기 배출구를 담요로 막고 수돗물을 틀어 유치장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경찰이 들어와 수돗물을 잠그고 가면 다시 수돗물을 틀었다. 경찰이 접근하면 물을 뿌리며 저항했다. 조사를 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할 때마다 똥오줌밥을 던졌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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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뒤 경찰이 출동해 오영자·임분이·허영춘·이계남 등 유가족을 한명씩 끌고 나갔다. 이들은 경찰차에 실려 난지도로 향했다. 난지도에 거의 도착할 즈음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 “남대문경찰서로 데리고 와!” 7명의 유가족이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박정기는 재판에 참여한 유가족이 전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향했다. 그는 경찰 책임자에게 요구했다. “어무이들 다 내놓그라. 안 그라믄 게서 다 죽을 끼다.” 하지만 경찰서에서는 현행범이라며 면회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경찰이 오영자를 끌고 수사과로 향했다. 오영자가 버티자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그가 바닥에 쓰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년이 질로 쎈 년이네. 독종이구만. 나한테 맛 좀 봐라.” 끌려가는 도중 온몸에 멍이 들었다. 다른 유가족들도 모두 조사를 받았다. 서로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임분이가 조사 도중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내가 했다. 그깟 서류 좀 찢으면 어떻나? 화장지만도 못한 판결문 찢으면 어떻나?” 실제 판결문이나 서류에 손도 대지 않았던 임분이는 이 말 때문에 8개월의 실형을 받게 된다. 유가족들은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고 몸싸움을 벌였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박정기가 말했다. “우리는 저 안에 갇힌 사람들과 한 운명입니더. 모두 풀려날 때까지 여기서 물러날 수 없습니더.” 그는 남대문경찰서 정문 옆 너른 처마 아래서 노숙농성을 하자고 제안했다. 유가족들은 종이상자와 신문지를 땅바닥에 깔고 농성을 준비했다. 유치장에 갇힌 유가족들도 신발을 벗어 마룻바닥을 두드리고 구호를 외치며 밤샘농성을 벌였다. 다음날 남대문경찰서는 유가족 전원에게 면회를 허용했다. 오영자·임분이는 일반 피의자들과 달리 별도의 건물에 수감되어 있었다. 박정기는 계단을 따라 지하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감방이 두 개였는데 한 곳엔 오영자, 한 곳엔 임분이가 갇혀 있었다. 박정기는 유치장 풍경에 아연실색했다. 바닥은 발목 위까지 물이 차 있었다. 오영자는 무언가를 뭉치더니 갑자기 유치장을 지키는 경찰들을 향해 내던졌다. 변기에 누운 똥과 오줌, 사식으로 제공된 밥을 섞어 만든 ‘똥오줌밥’이었다. 똥오줌밥 여러 개를 만든 그는 하나씩 던지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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