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조선일보사 편집국에서 ‘삼양화학 한영자 사장과 최루탄 화해’ 왜곡보도에 대한 항의농성을 해온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오른쪽 둘째)씨가 1988년 12월1일 ‘정정보도 합의문안’에 서명하고 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62
1988년 11월29일 ‘최루탄 화해’ 왜곡보도를 항의하러 조선일보사로 간 유가족들은 편집국을 점거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편집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편집국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잠겨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니 진공청소기의 흡입관이 보였다. 허영춘(허원근의 아버지)과 신정학(신호수의 아버지)이 쇠로 된 흡입관을 들어 문 손잡이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부서졌다. 문 너머에서 납땜하는 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이 막히자 유가족들은 편집국 점거를 포기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유가족들은 로비에서 정정기사가 실린 신문이 나올 때까지 농성을 벌였다. 조선일보는 1층 입구의 셔터를 내려 건물을 봉쇄했다. 기자들은 후문으로 드나들었다. 박정기 등은 유가족들과 분리된 상황에서 편집국 기자들과 지루한 협상을 벌였다. 편집부장이 마대복을 따로 불러 사진을 보여주며 설득했다.
“여기 보십시오. 분명히 악수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를 설득해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정보도는 어렵습니다.”
마대복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배은심을 믿으면서도 사진을 보면 흔들렸다. 그는 며칠 뒤 상황을 재연해 보았다. 사진기로 연속촬영을 하자 그중 한두 장의 사진이 조선일보의 사진과 유사하게 나왔다. 그제야 일말의 의구심을 떨칠 수 있었다. 박정기는 조선일보 책임자에게 요구했다.
“정정기사는 지난번 기사와 크기가 다르면 안 됩니더. 그라고 신문을 발행하기 전에 우리에게 기사를 보여주시오. 끝으로 인쇄된 신문을 볼 때까지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낍니다.”
기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정기사는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검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정기사를 싣더라도 같은 크기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박정기와 배은심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자 한 명이 주변에 다른 기자들이 없는 틈을 타 마대복에게 귀엣말을 했다.
“저희 잘못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예가 없어서 어려울 거예요.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대복은 그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배은심의 훼손된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유가족들은 한번 싸우면 물러나는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편집국엔 ‘유가협의 트로이카’로 불리는 박정기와 배은심, 이소선이 있었다. 이들은 한 달이 걸려도 농성을 풀 생각이 없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서슬에 결국 조선일보는 두 손을 들었다. “저희가 사과드립니다. 정정기사를 싣겠습니다.” 박정기와 배은심은 정정기사가 실린 새벽에야 신문을 받아들고 유가족들과 함께 조선일보사를 빠져나왔다.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하지 않은 보도 정정 투쟁은 언론사상 희귀한 사례이고 완전한 승리였다. 이 소식을 들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며칠 뒤 배은심을 만난 자리에서 탄복하며 말했다. “허허, 한열 엄마 대단하십니다. 동서고금에 신문 기사를 이렇게 정정한 사례를 나는 첨 봤습니다. 어머니와 유가협이 아니면 감히 누가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종종 박정기와 배은심에게 방법을 묻고 있다. 어떤 방법을 일러줬냐고 물을 때면 박정기는 이렇게 말한다. “앞뒤 안 보고 쳐들어갔으이 된 기지. 그놈들이 말로 해서 통할 놈들이가?” 12월7일 박정기는 관광버스를 대절해 유가족들과 함께 경남 창원의 대우중공업으로 향했다. 의문사 유가족 한 명을 지원하기 위한 싸움에 유가족들 전체가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정경식의 어머니 김을선은 창원에서 민가협과 유가협 회원들을 기다렸다. 지난달 언론을 통해 농성 소식을 접한 김을선은 기독교회관으로 찾아가 박정기를 만났다. 그는 매일 밤새워 아들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놓았다. 농성 기간 중 경찰서에 여덟번이나 연행될 정도로 투쟁에도 열성이었다. 하루는 김을선이 박정기에게 부탁했다. “우리 아들 쥑인 범인이 공장 안에 있는데 회사에선 사건을 묻어삡니다. 그라니께네 내가 관광차를 하나 대절할텐께 우리 유가족들이 가가지고 그 사람을 만내보믄 좋겠십니더.”
박정기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람 관광차를 대절하십시오. 우리가 갈 기구마.”
유가족들도 의견을 모은 후 창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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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잘못입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예가 없어서 어려울 거예요.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대복은 그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배은심의 훼손된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유가족들은 한번 싸우면 물러나는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편집국엔 ‘유가협의 트로이카’로 불리는 박정기와 배은심, 이소선이 있었다. 이들은 한 달이 걸려도 농성을 풀 생각이 없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서슬에 결국 조선일보는 두 손을 들었다. “저희가 사과드립니다. 정정기사를 싣겠습니다.” 박정기와 배은심은 정정기사가 실린 새벽에야 신문을 받아들고 유가족들과 함께 조선일보사를 빠져나왔다.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하지 않은 보도 정정 투쟁은 언론사상 희귀한 사례이고 완전한 승리였다. 이 소식을 들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며칠 뒤 배은심을 만난 자리에서 탄복하며 말했다. “허허, 한열 엄마 대단하십니다. 동서고금에 신문 기사를 이렇게 정정한 사례를 나는 첨 봤습니다. 어머니와 유가협이 아니면 감히 누가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로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종종 박정기와 배은심에게 방법을 묻고 있다. 어떤 방법을 일러줬냐고 물을 때면 박정기는 이렇게 말한다. “앞뒤 안 보고 쳐들어갔으이 된 기지. 그놈들이 말로 해서 통할 놈들이가?” 12월7일 박정기는 관광버스를 대절해 유가족들과 함께 경남 창원의 대우중공업으로 향했다. 의문사 유가족 한 명을 지원하기 위한 싸움에 유가족들 전체가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정경식의 어머니 김을선은 창원에서 민가협과 유가협 회원들을 기다렸다. 지난달 언론을 통해 농성 소식을 접한 김을선은 기독교회관으로 찾아가 박정기를 만났다. 그는 매일 밤새워 아들의 억울한 사연을 풀어놓았다. 농성 기간 중 경찰서에 여덟번이나 연행될 정도로 투쟁에도 열성이었다. 하루는 김을선이 박정기에게 부탁했다. “우리 아들 쥑인 범인이 공장 안에 있는데 회사에선 사건을 묻어삡니다. 그라니께네 내가 관광차를 하나 대절할텐께 우리 유가족들이 가가지고 그 사람을 만내보믄 좋겠십니더.”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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