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18일, ‘군 부재자투표 부정선거’에 대한 ‘명예 선언’으로 파면당한 육군 장교 이동균 대위·김종대 중위 환영대회가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렸다. 이들은 1월5일 유가족들의 농성장인 기독교회관을 찾아와 양심선언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66
1989년 1월5일 박정기와 이소선은 군인장교 두 명과 함께 기독교회관 농성장에 들어섰다. 이들은 이동균 대위와 김종대 중위로, 육군 제30사단 공병대대 소속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 위해 현역 장교로서 위험을 감수하고 탈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소선이 장교들의 가방을 보고는 소리쳤다.
“종철 아버지, 이기 웬 신나(시너)가 있는교?”
가방 안엔 두 통의 시너가 들어 있었다. 박정기는 깜짝 놀라 시너를 빼앗았다. 장교들은 계획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군대의 용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흰 분신을 통해 군의 민주화를 위해 한 목숨 바칠 계획입니다.”
박정기는 두 장교를 나무랐다.
“무신 소린교? 분신은 안 됩니더. 현역 군인으로 이마만한 용기를 낸 건 가상한 일이지만, 분신하겠다느니 하는 그란 소린 다시 하지 말그라.”
그는 빼앗은 시너를 농성장 한 곳에 감추었다. 이소선이 장교들의 분신 계획을 만류하고 설득하는 동안 박정기는 여러 신문사를 돌아다녔다. 도청을 피해 각 언론사의 기자들을 한명 한명 직접 만나 은밀히 부탁했다.
“꼭 취재해 주이소. 이대로 장교들이 부대에 복귀하면 큰일이라.”
기자들이 속속 기독교회관에 도착했다. 계훈제·문익환·백기완·이재오가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최초의 집단적인 군인 양심선언이었다. 양심선언자는 이동균·김종대 외에 이청록 중위, 박동석 소위, 권균경 소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다섯명의 양심선언자를 대표해 탈영한 것이다. 두 장교는 유가족과 기자들 앞에서 ‘명예 선언문’을 읽었다.
“우리는 불명예로 군을 이끌었던 정치군인들에게 진실한 각성과 반성을 촉구한다.”
“(우리 군인은) 반민족적, 반민주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선언문을 읽은 뒤 김종대 중위가 87년 대통령선거 부재자투표에서 벌어진 부정선거를 비판하며 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했다.
“모든 장교를 모아놓고 ‘너 누구 찍을 거야? 빨갱이 찍을래?’ 하면서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데 굴복하지 않을 놈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런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 군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이들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가 79년 정권을 탈취했던 쿠데타 날인 12월12일에 맞춰 양심선언을 하려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미루었다고 고백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은 급히 기사를 작성해 신문에 실었다. 박정기는 이재오와 함께 군인들을 택시에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5시 무렵에야 30사단 소속 부대에 도착했다. 위병소 앞에서 박정기는 장교들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있으니 용기를 내라. 엄한 생각을 해선 절대 안 된다.”
부대로 복귀하는 장교들의 뒷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동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박정기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먼 길을 달려가 장교들을 면회하고 위로와 용기의 말을 건네었다.
부대에 복귀한 두 장교는 헌병대로 끌려갔고, 육군은 장교들을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려 했다. 유가족들은 농성장에서 ‘장교들의 즉각 석방과 원대 복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구명 활동을 벌였다.
박정기와 유가협의 노력에 힘입어 장교들은 다음달 석방되었다. 하지만 사단 징계위원회를 통해 이동균·김종대는 파면되었다. 이들은 이등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제대했다. 제대 뒤 두 사람은 유가족들을 찾아와 고마움을 전했다.
“어머니들 때문에 저희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김대중 정부 시절 명예를 회복하고 군에 복귀하려 했지만,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89년 1월14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박종철 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의 공식 명칭은 ‘민주열사 박종철 2주기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였다. 학생, 시민 5000여명이 참여했다. 지난 25차례의 추모식 중 박정기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4년의 수배생활을 마친 박종운이 이날 추모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박종운은 수배중인 88년 박종철 1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박종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종철이의 원혼 앞에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종철이의 따뜻한 마음씨와 불굴의 의지에 대한 추억이 휘몰아쳐 올수록 저에게는 자책감과 함께 끝내는 일어서고 말리라는 결의가 더욱 굳어집니다. … 누나가 손수 짜주었다는 목도리도, 추워 보인다면서 선뜻 벗어 제 목에 감아주던 그런 애였습니다. 종철이는 저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종철이는 그 모진 물고문 속에서도, 전기고문 속에서도, 동료 선배를 지켜내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종철이는 우리 모두의 기개로 살아 있습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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