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70
박종철 초혼장을 하루 앞둔 1989년 3월2일 사리암의 백우 스님이 박정기를 불러 말했다.
“임진강에서 흙을 한 삽 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람의 몸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니 우리 불자에겐 흙이나 유골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듣고 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길로 박정기는 도승, 범진 스님과 함께 임진강 지류 아들 철이의 유골을 뿌린 곳을 찾아가 흙을 한 움큼 파내서 흰 종이로 감쌌다.
3월3일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렸다. 초혼장이 열린 이날은 두 해 전 49재가 열린 날로, 전국 곳곳에서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가 가득했었다.
장례식은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렸다. 유가협 회원들과 시민, 학생 1000여명이 운집했다. 장례위원장은 문익환 목사였다. 애초 백기완 소장이 맡기로 했는데, 전날 집회가 열린 임진강 인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급히 문익환에게 부탁한 것이다.
장례식을 마친 뒤 아들의 친구들이 빈 관을 들고 앞장섰다. 박종철의 자취가 있는 교정 곳곳을 돌며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혼을 불러 모으는 의식이었다. 운구가 꽃차에 실렸다. 비바람에 만장이 나부꼈다.
장례위원회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노제를 치를 계획이었다. 운구차가 정문을 나서자 전경 수천명이 길을 막았다. 경찰은 남영동 방향 도로를 모두 차단했다. 시민들은 길을 가로막은 전경들에게 항의했다.
서울대 정문 앞에서 1시간가량 멈춰선 운구차는 별수 없이 봉천사거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사거리에 도착하자 다시 전경들이 길을 막았다. 경찰은 교통 혼잡을 이유로 곧장 묘지로 향할 것을 요구했다.
멈춰선 자리에서 4시간 가까이 대치하며 버텼다. 시민들이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대열을 뚫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관식을 더 늦출 수는 없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길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멀고 험난했다. 하루 종일 가로막힌 길 위에서 서성인 끝에 사거리에서 노제를 치르고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모란공원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시께였다. 비는 밤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횃불을 켜고 묘를 만들었다. 박정기는 관 뚜껑을 열었다. 석관 안에 임진강에서 가져온 흙을 넣었다. 시신 없는 관이었지만 흙이나마 담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박정기는 아들이 영원히 거처할 곳을 마련했다는 생각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철아,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이곳 선배들과 잘 지내거라. 니는 친구 사귀는 데 일가견이 있지 않나. 부디 평안히 잘 가그래이.”
아들의 넋은 더이상 세상을 떠돌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아들을 모란공원 양지바른 곳에 옮겨 묻었다.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하루였다.
이어 3월31일 안국동의 아랍미술관에서 ‘만남의 집(한울삶) 마련을 위한 서화전’이 열렸다. 서화전은 지난 1월 유가협 임시총회에서 결정한 사업으로 박정기는 지난해 8월부터 준비해왔다. 사무실을 마련하자는 얘기는 88년 봄부터 나왔다. 그동안 유가협은 별도의 사무실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회의가 있을 때마다 장소를 잡기가 여의치 않았다.
몇 차례 사무실을 얻으려 했으나 운동단체라는 이유로 입주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렵게 사무실에 입주했지만 경찰이 집주인에게 압력을 가해 쫓겨난 적도 있다. 그리고 지방 회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유가족들은 송광영의 어머니가 사는 서초동 움막집 등을 찾거나 허름한 여관에서 잠들곤 했다. 대부분의 유가족이 가난한 형편이라 서울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다. 여러모로 직접 집을 구하는 길이 최선이었다.
출판사 일월서각을 운영하는 김승균이 이런 처지를 알고 집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창립 때부터 유가협의 간사장으로 박정기와 이소선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던 이다. 김승균은 내심 서화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기는 이소선, 조인식, 김승균, 조성만의 형 등과 함께 전태일기념사업회에 모여 유가협 운영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김승균이 집을 마련하자고 제안하자 이소선이 먼저 입을 뗐다.
“우리는 아무리 사무실을 만들려 해도 쫓기나고 이래 싸니 어디 가서 붙어 있지도 못합니다. 그란데 돈이 한 푼도 없는데 무슨 수로 집을 마련합니까?”
박정기도 수차례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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