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봄 서화전을 열어 유가협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종잣돈을 모은 박정기씨와 유가족들은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의 허름한 한옥을 구해 그해 12월17일 입주했다. 신영복 선생이 서화전 때 기증한 글씨 ‘한울삶’(사진)을 만남의 집 이름으로 정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73
1989년 4월 초 유가협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기금모금 서화전은 서예가로서 쇠귀 신영복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통혁당 사건 무기수’에서 88년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그의 글씨는 20년간 감옥에서 스스로 깨친 사색을 담아 특히 인기가 많았다.
서화전을 마칠 무렵 <문화방송>의 시사다큐 프로그램 ‘MBC 리포트’의 한 기자가 찾아왔다. 그는 박종철 고문 사건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의문사 문제를 다룰 계획이라고 말했다. 유가협은 동행 취재할 유가족으로 박래군을 보냈다. 두 사람은 강릉에서 출발해 1주일 동안 전국을 다니며 김성수, 신호수 사건 등 4명의 의문사 현장을 취재했다. 그동안 유가족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 파악한 내용을 직접 조사하며 진실을 추적하는 여정이었다. 박래군은 이때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 10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한달 남짓에 걸쳐 제작된 시사다큐 프로그램은 그해 4월26일 ‘의문사, 자살인가? 타살인가?’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여소야대 국면이라고 하지만 의문사 문제를 방송에서 다루는 일은 큰 용기가 필요할 때였다. 그 기자가 바로 지금 문화방송 사장인 김재철이다. 한때 의문사 문제를 파헤치는 정의로운 기자였던 그가 정권에 굴종하고 언론 자유를 가로막는 인물로 후배들의 퇴출 대상이 된 것이다.
서화전을 마친 뒤 박정기는 남은 작품을 들고 구매자를 찾아나섰다. 이번에도 김승균 간사장이 도왔다. 주로 재야 인사와 정치인 들을 만났다. 그는 박채영의 중고 ‘포니’ 승용차에 작품을 싣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돈이 다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정기는 집부터 물색했다. 처음엔 이소선·이오순(송광영의 어머니)과 함께 명륜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서울 변두리에 넓은 집을 얻을 수 있었지만, 지방 회원들이 찾아오기 쉬운 곳으로 잡아야 했다. 이소선이 복덕방을 통해 봐둔 동대문의 어느 한옥집으로 박정기를 데리고 갔다. 옷공장(마치코바)으로 사용하는 집이었다.
“종철 아버님. 이 집은 서울역에서 가찹고, 동대문역에서도 찾아오기 쉽습니다.”
건물이 딱 마음에 들었다. 민가협 사무실과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도 가까웠다. 박정기는 우선 빚을 내 집을 계약한 뒤 유가족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저희가 이만큼 애썼지만 이 돈으론 택도 없습니다. 그란데 없는 돈을 뉘기 만들어주겠습니까? 각자 형편껏 내서 집을 마련해 봅시다.”
유가족들은 적게는 5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까지 두세 차례의 갹출로 자금을 마련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서준식도 유가협의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줬다.
89년 12월17일. 유가협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이대병원 뒤편 27평의 한옥 건물에 입주했다. 한옥집 앞 골목에서 집들이를 했다.
유가협의 한옥집 이름은 ‘한울삶’이다. 박정기는 전시회 기간 동안 신영복의 작품 ‘한울삶’을 눈여겨보았다. ‘한울타리’, ‘하늘 같은 삶’, ‘한가족처럼 사는 삶’, ‘한자리에 사는 우리들의 살림살이’ 등의 뜻을 지닌 글씨였다. 집들이를 앞두고 박정기는 박래군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래군이. 이 집에 이름을 하나 붙이야 되겠는데 뭐라꼬 붙이까?”
“글쎄요. 유가협이 있는데 따로 이름이 필요할까요? 아버님이 생각하는 이름이 있으세요?”
“신영복 선생 작품 중에 ‘한울삶’이라 카는 게 있는데 신 선생 잩에 가가 저 글자를 우리가 쓰면 안 되겠냐고 말해볼 끼다.”
박정기는 유가족들에게도 제안했다.
“자식을 잃고 내캉네캉 서로 의지하며 사는 우리에게 안성맞춤 아입니까?”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박정기는 여러 차례 설득해 동의를 얻었다. 그는 신영복을 찾아가 ‘한울삶’ 글씨를 하나 더 써달라고 부탁했다. 신영복은 기꺼이 승낙했다.
“유가협에서 사용한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도 기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가협의 한옥집은 ‘한울삶’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박정기는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한울삶’ 글씨를 동판으로 제작해 유가협의 이름으로 선물했다.
한울삶은 감옥에서 풀려난 양심수들이 맨 먼저 찾아오는 곳이 되었지만, 장기수들이 출소할 땐 유가협 회원들이 먼저 찾아가 인사하곤 했다. 신념을 지키며 수십년 감옥살이를 감내한 장기수들에 대한 예우였다. 후일 박정기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에서 만난 한 장기수가 ‘한울삶’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때 주신 ‘한울삶’ 동판을 소중한 곳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통일되는 날 와서 확인하십시오.”
“통일되면 꼭 찾아가겠습니다.”
하지만 박정기는 이루기 어려운 약속이란걸 알고 있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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