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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강경대 공판’ 항의로 구속…첫날부터 ‘점호’ 거부 / 박정기

등록 2012-04-09 20:21

1991년 7월4일 강경대군 폭행치사 사건 첫 공판에서 유가족들의 법정 소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수배당한 박정기(왼쪽)씨가 7월6일, 강민조(오른쪽)씨가 7월11일 자진출두하고 있다. 신군부의 공권력에 의해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는 나란히 구속돼 실형을 살며 ‘민주투사’로 거듭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7월4일 강경대군 폭행치사 사건 첫 공판에서 유가족들의 법정 소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수배당한 박정기(왼쪽)씨가 7월6일, 강민조(오른쪽)씨가 7월11일 자진출두하고 있다. 신군부의 공권력에 의해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는 나란히 구속돼 실형을 살며 ‘민주투사’로 거듭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89
1991년 7월5일 부산에서 출발한 심야열차가 서울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정기는 감옥살이가 아들을 이해하고 종철에게 한발 더 다가서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밤새 검찰에 출두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아침 박종부가 사는 마포의 진주아파트 경비실에 도착했을 때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이 나타났다.

“내를 붙잡지 마시오. 내 스스로 출두하려고 왔으니 억지로 붙잡지 말란 말이오. 잠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같이 갑시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갑자기 형사들이 양옆에서 팔을 붙잡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자들이 사진기를 들었다. 형사들은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정기는 화가 치밀었다.

“이거 약속이 다르잖아. 이 팔 놓아요. 내 발로 간다니까.”

하지만 형사들의 억센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검찰청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무렵이었다. 조사는 6시간 넘게 이어졌다. 밤샘조사를 마친 뒤 그는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강민조는 7월11일 광주에서 자진출두해 서울로 압송됐다.

박정기는 7월7일, 강민조는 7월12일 구속되었다. 한명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타살된 박종철의 아버지였고, 또 한명은 노태우 정권에 의해 타살된 강경대의 아버지였다.

이미 한차례 옥살이를 했던 이오순·오영자는 이중주(민가협)와 함께 2년 넘게 수배생활을 했다. 두 어머니는 유가협 간사 박래군과 정미경이 마련해준 옷과 모자·선글라스를 쓰고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보따리를 들고 전국을 떠돌며 실향민처럼 지냈다. 부상으로 입원중이던 오영자는 목발을 짚은 채 병원을 나왔다. 그는 3년 동안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강경대 공판 소동 이후 사법부는 법정에서 박수를 치는 거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재야에서 유명한 유가협의 법정투쟁은 다시 보기 어려워졌다. 유가협과 민족민주열사추모사업회 등은 박정기·강민조의 구속에 항의해 7월11일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날 대검찰청 청사 앞에서 연좌농성도 벌였다.

박정기는 검찰에 자진 출두할 결심을 굳히면서부터 구치소를 아들과 만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에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종철은 이제 전에 알던 아들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가로 거듭난 그가 만나게 될 새로운 이름이었다. ‘아들’이 아니라 ‘박종철’이 감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영등포구치소 5사 하 3방. 그해 여름 동안 그가 머물 감방이었다. 대여섯평 크기의 감방엔 16명의 재소자가 모여 있었다. 그가 들어오기 전 교도관들은 재소자들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이 방에 곧 대단한 분이 오십니다. 그분껜 청소를 시키면 안 되고, 식사 당번도 제외해야 합니다. 복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아 주십시오.”

하지만 박정기는 편한(?) 감옥살이를 거부했다. 철컹, 하고 철문이 닫히자 재소자들이 복도에서 가장 먼 자리로 그를 안내했다. 옥살이는 처음이었지만 감방의 자리 배치에 대해선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박정기는 화장실 앞 신입 재소자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러지들 마세요. 원래 하는 대로 합시다.”

“무슨 소립니까? 선생님 자리는 여깁니다. 그곳에 앉으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박정기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는 호의를 받으며 감옥살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입방 첫날 점호 시간이었다. 재소자들이 줄지어 서서 순서대로 번호를 외치며 인원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박정기는 점호에 앞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소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박정기를 불렀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군대식 관리와 통제에 고분고분 응하고 싶지 않았다. 점검반이 시찰구를 통해 감방 안을 살피며 외쳤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번호!”

“하나, 둘, 셋….”

교도관은 다음 감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한 사람이 빠진 걸 깨달았다. 다시 돌아와 외쳤다.

“번호 다시!”

하지만 이번에도 인원이 모자랐다. 전과 17범의 소매치기 ‘정박사’가 난처해하며 화장실을 가리켰다.

“박 선생이 배가 아프십니다.”

교도관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실랑이는 점호 시간마다 되풀이되었다. 박정기는 그때마다 고함을 지르고 쇠문을 걷어찼다. 교도소 쪽에서 손을 들었다. 그는 교도관들에겐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반면, 식사 당번이나 청소를 솔선수범하며 살림을 도맡아 재소자들에겐 인기가 많았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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