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박정기는 민가협 소속에서 독립한 유가협을 본격적인 민주화운동 단체로 이끌었다. 92년 3월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열사추모사업회 연대회의 주최로 그해 6월 경희대에서 열린 합동추모제를 끝내고 유가족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91
1991년 10월24일 박정기는 99일 만에 집행유예로 영등포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아들 박종철과 비슷한 수감기간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보낸 날들을 회고하며 어느날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오직 부끄럽게 살았던 내 과거의 모습을 씻어버리고 종철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재판과 감옥은 이처럼 나와 종철이를 본격적인 동지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해 10월 나는 웃으며 영등포구치소를 나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나만이 알 것이다.”
박정기가 출소하던 날 ‘경제방’의 재소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아쉬움에 훌쩍이기도 했다. 영등포구치소에서 정이 든 재소자들은 출소 뒤 박정기를 찾아왔다. ‘정 박사’도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왔지만 몇해 지나 연락이 끊겼다. 절도죄로 다시 잡혀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박정기를 맞이하러 유가협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마중을 나왔다. 박정기는 구치소 문을 나서며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아버님, 미리 나와 계셨어요?”
“와 인자 오노? 한참을 기다렸다. 재판받자마자 나가라카드라. 내를 찾아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데이.”
이날 그는 한울삶에서 밤늦도록 감옥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박정기는 출소했지만 강민조(강경대의 아버지)는 아직 감옥에 있었다. 박정기는 출소 뒤 유가협 소식지 <한울삶>에 아래와 같은 글을 실었다.
“피붙이를 군사독재에 뺏긴 가족은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원한을 풀며 그들의 뜻을 아로새기기 위해 만고의 몸고생을 마다 않고 헤매기 그 얼마인가요? 이 황토 이 강산을 사랑하고 이 민중을 사랑하고자 천고의 꿈을 품고…. 여러분, 비록 몸뚱아리는 무쇠철창에 가둘지라도 정신만은 가둘 수 없습니다. … 외진 곳에 남겨두고 온 경대 아버지의 아픈 가슴을 다 어루만져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1991년 11월13일치)
그해 11월30일 성균관대에서 여섯번째 유가협 정기총회가 열렸다. 정기총회는 매년 8월12일 열렸지만, 이해에는 박정기의 구속과 두 어머니의 수배 때문에 날짜를 늦춘 것이다. 박정기는 이날 유가족 회원 130여명을 대표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후원회장은 문익환 목사가 연임하고, 부회장은 진관 스님과 김거성 목사가 뽑혔다.
민가협의 여섯개 협의체 가운데 하나로 연대했던 유가협은 이때부터 민가협에서 탈퇴해 완전한 독립 단체로서 재출발했다. 민가협 탈퇴는 유가협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더 많은 짐을 떠안기 위한 결단이었다. 박정기는 재출발의 무거운 짐을 지고 첫걸음을 내디뎠다. 유가협 창립 이후 내리 5년 동안 회장을 맡았던 이소선은 이임사에서 새 회장 부임을 축하했다.
“이 5년 동안 부족한 저는 유가협 회장 자리에 계속 있으면서 ‘독재’ 아닌 ‘독재’를 하였습니다. 신임 회장이신 박종철 아버님은 그동안 유가협을 위해 헌신하신 훌륭한 분이십니다. 이제 저는 평회원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활동한 것보다 더 열심히 회장님을 도와 활동하겠습니다. 유가협을 중심으로 모든 회원들이 단결하여 더이상 수많은 죽음들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92년 3월15일 숭실대에서 ‘전국민족민주열사추모사업회 연대회의’가 출범했다. 90년 열렸던 합동추모제를 계기로 2년간의 준비 끝에 전국 40여개 추모사업회가 모인 것이다. 연대회의의 초대 의장은 진관 스님이 맡았다.
그에 앞서 후원회는 성치 않은 몸으로 전국에서 열리는 집회와 파업 현장, 추도식을 쫓아다니는 유가족들을 위해 ‘봉고차’ 마련에 나섰다. 특히 집회와 추도식이 몰린 5~6월에는 거의 날마다 전국 각지를 오가야 해서 이동 수단이 절실했다.
3월7일 성대 앞 호프집 ‘작은 세상’에서 하루주점 ‘새봄을 여는 한울삶 작은 잔치’를 열어 자금을 마련했다. 창비, 실천문학사 등의 출판사와 파업중이던 <문화방송>(MBC) 노조, <한국방송>(KBS) 노조 등에서 후원금을 보내줬다. 옥중에 있는 문익환과 91년 분신정국에서 인연을 맺은 이수호는 영치금으로 들어온 돈을 기부했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돈은 이행자 시인이 소장한 고서적을 팔아 보탰다.
유가협은 장안평에서 중고차 매매업을 하는 임종석(전대협 전 의장) 아버지의 도움으로 출고된 지 9개월 된, 새 차나 다름없는 봉고차를 구매했다. 4월4일 ‘새날을 위해 달리는 봉고차 기증식’을 했다. 후원회는 고사를 지낸 뒤 박정기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다. 봉고차는 주로 박채영이 운전했다. 이날 마련한 차는 97년까지 유가족들과 함께 전국의 투쟁 현장을 향해 함께 달렸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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