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교사 유무 따라, 도서관 양극화
직원→독서교육전문가 인식 변해야
직원→독서교육전문가 인식 변해야
“<위대한 탄생> 봤어?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까 1등 한 구자명도 영웅이야. 우리 구자명 사연으로 이야기 바꿔볼까?”(3학년 유지인양)
“원래 축구선수였는데 부상 때문에 선수생활도 접었고, 자장면 배달도 했었을 거야. 자기 나름의 역경도 있었던 거잖아.”(3학년 양승희양)
두 학생이 의견을 내자 나머지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6친친’이라는 이름의 조원들은 얼마 전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등을 거머쥔 청년의 이야기로 영웅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다. 실제 이름인 ‘구자명’을 ‘십자명’으로 재치 있게 바꾸는 가운데 웃음보따리가 터졌다.
지난 4월6일 충북 청주 수곡중 학교도서관 참글누리에서는 이렇게 3학년 4반 학생들의 국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수업의 주제는 ‘박씨전을 차용해 현대극으로 재해석하고 극본 짜기’였다. 학생들은 이전 시간에 박씨전을 함께 읽고 영웅소설의 서사구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먼저 살폈고, 이날은 학교도서관에 모여 조별로 직접 영웅소설 플롯으로 이뤄진 이야기를 만들었다.
수업의 시작은 박영아 국어교사가 열었다. “여러분이 글 쓸 주제를 정한 뒤에 여기에 맞는 다양한 자료를 제대로 찾고 참고해보라는 의미에서 도서관에 왔습니다. 자료에 대해서는 사서 선생님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곧 손민영 사서교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손 교사는 준비해놓은 영웅 관련 책(<나니아 연대기>, <칼의 노래>, <열일곱 살의 털>)들을 한 권씩 소개했다. “자, 이 책(<열일곱 살의 털>)에서 말하는 ‘털’이 뭘까요? 겨털?(웃음) 이 책의 주인공은 여러분처럼 학생이에요. 근데 두발규제에 반대해서 1인시위를 합니다. 이 친구는 영웅일까, 아닐까?” “영웅이요!” 손 교사의 질문에 학생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자, 이 책의 주인공처럼 여러분 일상에도 영웅들이 있습니다. 영웅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허풍이어선 안 됩니다. 진실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역사, 사회적 맥락 등을 파악해야 하고, 자료를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유익한 자료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쓰는 일이 많아요. 제가 추천한 이 책들을 참고해도 좋고, 도서관에 있는 다른 책들을 참고해도 좋습니다.”
‘6친친’ 조원들은 손 사서교사의 설명을 듣고 주제를 ‘독도’로 잡았다가 ‘오디션’으로 바꾼 경우다. 유지인양은 “사서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우리 주변에도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사례가 많은 것 같아 텔레비전 속 주인공 이야기를 가져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손 교사는 “이런 수업을 통해서 교과서 안에만 갇힌 지식이 아니라 삶과 연계되는 살아 있는 지식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손 교사는 이런 방식의 수업을 ‘도서관 협력수업’이라고 했다. 교과교사인 국어교사와 사서교사가 손잡고 이뤄낸 합작품이다. 박 교사가 영웅소설과 관련한 단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교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 이뤄진 일이다. 이런 방식의 수업을 통해 박 교사는 “느낀 게 많다”고 했다. “첫 시간에는 아이들이 영웅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나 감을 못 잡던데 사서 선생님이 구체적으로 정보를 주시니까 감을 잡고 정말 심도 있게 진행하는 게 보입니다. 요즘 다른 학문들끼리 ‘통합’이 중요한 시대잖아요. 과학을 배우더라도 ‘과학사’로 들어갈 경우, 교과교사 혼자서는 수업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사서교사와 협력해 수업을 하면서 정보 활용을 제대로 하도록 도왔으면 좋겠습니다.”
6교시에는 2학년 2반 학생들이 창의적 재량활동인 <진로와 직업> 수업을 하러 도서관에 왔다. 다른 학교에서는 사서교사가 대출, 반납 업무를 하는 일이 많지만 이 학교에서 이런 업무는 도서위원들이 주로 하고 있었다. 손 사서교사는 직접 수업 준비를 했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학기 초, 도서관과 친해지는 게임의 일환으로 선생님이 내준 책 관련 질문에 답하는 게임을 했다. “1900년대 이전에 살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찾아라!” 2학년 김은진양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역사, 문학 책이 꽂혀 있는 서가를 살피다가 <춘향전>을 꺼냈다. “책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서지정보, 목차 등을 찾아보니까 책에 대한 흥미가 생깁니다.”
쉬는 시간, 손 교사는 도서위원들을 지도하면서 책을 읽고 추천하는 글을 써왔다고 내미는 학생들을 응대했다. 때론 말도 없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수줍게 쓴 글을 내밀기도 한다. 손 교사는 “학교도서관에 오는 친구들 가운데에는 교실이나 운동장 두 곳 모두 가지 못하고 외롭게 오는 친구들이 많다”며 “학교에 오는 행복이 뭔지를 알려주는 것, 삶 속에서 책을 잘 활용하고, 독서가 꽃피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내 일”이라고 했다.
서울 우신고에서도 사서교사는 대출 업무만 책임지는 행정직원이 아니다. 소병문 사서교사는 얼마 전 철학 수업에 들어가 정보활용교육을 했다. 학생들은 철학 수업을 듣고 말미에는 관련 소논문을 써야 한다. 이때 전문서적, 신문자료, 인터넷 자료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건 사서교사다. 사서교사는 정보활용법을 알려준 뒤 워크시트를 나눠주고 학생이 자료를 어떻게 탐색했는지도 살핀다. 소 교사는 “아이들이 자료를 제대로 찾았는지를 보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도 한다”고 했다.
두 사서교사의 사례는 사서교사가 ‘교육 허브’라고 부르는 학교도서관에서 독서교육, 정보활용교육, 진로교육 등을 돕는 전문인력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문 사서교사가 있고, 학교 쪽에서 사서교사에게 그만의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이 마냥 ‘남의 사연’으로 보이는 학교들도 있다. 대부분의 학교에 사서교사는 없거나 사서교사 대신 사서직원 또는 학교도서관 담당 교사들이 있을 뿐이다.
지난 4월2일 경남 김해 한 고교에 다니는 고3 김아무개양은 문이 닫힌 학교도서관을 찾았다가 실망하고 돌아왔다. 김양은 “공부에 필요한 책부터 읽고 싶은 책까지 책을 보려면 주변 공공도서관으로 가야 하는데 주말밖에 시간이 없어 힘들다”고 했다. 지난해까지는 그나마 열정 있는 학교도서관 담당 교사가 신경을 써줬지만 올해 도서관을 맡은 교과교사는 도서관 문을 여는 일조차도 관심이 없다. 김양은 “학교 쪽에 ‘책을 읽고 싶다’고 요청해서 도서반에 예산이 내려왔지만 문제는 도서관 관리 자체를 안 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학교도서관 양극화 현상은 시설의 문제는 아니다. 2007년 학교도서관진흥법을 제정하면서 우리나라 학교도서관 설치율은 90%가 넘는다. 하지만 2010년 기준 전체 학교 1만1237곳 가운데 사서교사 배치율은 6.4%에 불과하다. 전체 학교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사서직원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 사서 35명, 비정규직 사서 4391명이 배치돼 있을 뿐이다.
많은 학교가 비정규직 사서를 두고 도서 대출, 반납 업무 위주로 학교도서관을 꾸려가는 수준이다. 아직까지 사서교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탓이다. 경기도 한 초등학교에서 계약직 사서로 10년을 일하고 현재는 무기계약직인 이아무개 교사는 “다른 교과교사들처럼 교사 자격이 있지만 학기 초 교사 소개를 할 때도 나를 뺀다”며 “학교도서관 문화를 살리기 위해 공을 들이지만 나를 교육자로 바라보지 않는 일들이 터질 때 정말 속상하다”고 했다. 문헌정보학과 졸업 뒤 교육대학원을 나온 이 교사는 사서교사가 되고 싶어 임용시험을 준비했지만 정원은 매해 줄었다. 한 학교에서 사서교사를 뽑는다고 해서 들어왔지만 비정규직이었다.
이아무개 사서교사는 “외국에서는 행정업무를 맡는 사서와 전문적인 정보활용교육을 맡는 사서교사가 별도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광주광역시 농성초등학교 유현정 사서교사는 “사서교사란 학생, 교사, 학부모를 도서관에 있는 소장 자료와 연결하는 독서교육 프로그래머, 커뮤니케이터”라며 “단순히 책 출납을 하는 게 아니고 독서 정보 활용교육 전반에 관여하는 전문인”이라고 했다.
교육당국은 독서교육과 평생교육, 창의력학습, 문제해결학습 등 학교도서관이 풀어줄 수 있는 여러 과제를 내놓는다. 하지만 열쇠를 쥔 사서교사의 임용 정원은 지난해 0명, 올해는 1명에 그쳤다.
글·사진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한겨레 인기기사>
■ 민자사업의 역습…지하철 9호선, 요금 기습인상
■ 백악관 경호원들 업무중 성매매
■ 민주, 대권·당권 얽혀서…‘임시지도부 구성’ 날샌다
■ 45만원짜리 치과용 앱 인기
■ 연해주에 ‘표범 나라’ 생겼다
■ 민자사업의 역습…지하철 9호선, 요금 기습인상
■ 백악관 경호원들 업무중 성매매
■ 민주, 대권·당권 얽혀서…‘임시지도부 구성’ 날샌다
■ 45만원짜리 치과용 앱 인기
■ 연해주에 ‘표범 나라’ 생겼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