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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유가족 연행에 항의하며 벌인 ‘최초의 1인시위’ / 박정기

등록 2012-04-19 19:44

1998년 6월26일 서울 서대문 경찰청사 앞에서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 시위를 하던 유가족들이 강제연행되자 유가협 회원들이 7월2일 다시 경찰청사로 몰려가 서대문경찰서장의 사과를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8년 6월26일 서울 서대문 경찰청사 앞에서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 시위를 하던 유가족들이 강제연행되자 유가협 회원들이 7월2일 다시 경찰청사로 몰려가 서대문경찰서장의 사과를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97
1998년 5월25일 유가협 회원들은 첫번째 폭압기구 항의방문 대상인 국방부를 찾아갔다. 집회를 막으려는 위병들과 몸싸움을 하던 중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유가족들이 갑자기 국방부 정문 안으로 돌진한 것이다. 비상경보가 울리고 총을 둔 군인들이 출동했다. 유가족들은 상황을 진정시킨 뒤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돌아왔다. 그 뒤 다시 국방부에 찾아갔을 땐 집회를 막기 위해 정문 옆에 화단을 만들어놓았다. 그때 생긴 화단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가족들은 폭압기구를 방문할 때마다 집회를 열었고 방해하는 이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기관의 대표자 면담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아울러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의문사와 관련한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성의 있게 자료를 제공하는 곳은 없었다. 국가기관들의 비협조는 훗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도 되풀이됐다.

경찰청을 항의방문한 날은 마침 비가 내렸다. 유가족들은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쓴 채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런데 서대문경찰서의 경찰들이 출동해 경고방송을 하며 위협했다. 서대문경찰서장이 직접 지휘하며 유가족 12명을 연행했다. 유가족들은 4개 경찰서로 나뉘어 수감됐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겪은 첫번째 연행이었다. 이날 부산에 내려가 있던 박정기는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했다. 그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우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좌시할 수 없데이. 이를 어물쩡 넘기면 항의방문이고 뭐고 없다. 이참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겠다.”

유가협의 손종필 사무국장은 집권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인권위원회에 항의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까지 연로한 어머니들이 연행되어야 합니까?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다음날 유가족들은 즉결재판을 통해 한 사람당 벌금 3만원씩을 낸 뒤에야 풀려났다. 유가협은 7월1일부터 경찰청 앞에서 강제연행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유가협 전체 회원이 모여 서대문경찰서 맞은편 네거리의 보도블록 위에서 연좌농성을 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 명씩 번갈아가며 경찰청 정문과 횡단보도 앞에서 1인시위도 했다.

유가협이 1인시위를 하게 된 것은 즉결재판을 받을 때 만난 판사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연로한 유가족들이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된 일을 안타까워한 판사가 연행을 피할 수 있는 시위 방법을 알려주었다. 박정기는 ‘1인시위’라는 용어가 생기기 전 최초의 1인시위자였다.

폭염이 쏟아지는 한여름이라 한 시간 서 있기도 힘겨웠다. 항의집회를 연 지 열흘이 지난 7월10일 언론에 유가족들의 항의농성이 보도되었다. 경찰청 보안국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전화를 받은 손종필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강제연행을 지휘한 서대문경찰서장이 배석하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습니다.”

총무인 최봉규가 손종필에게 물었다.

“우리가 낸 벌금액이 얼마냐? 경찰서장 만나면 그 돈 보상해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국가가 뺏어가냐. 순 날강도 아니냐!”

국가의 폭력으로 억울하게 빼앗긴 돈을 정확하게 받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번엔 서대문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서장님이 꼭 배석해야 하겠습니까?”

손종필이 윽박질렀다.

“뭔 소립니까? 당신들 행동이 떳떳하면 와서 똑바로 얘기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농성하며 지출한 밥값하고 벌금 낸 돈 가져오십시오.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나흘 뒤 경찰청에서 청장이 직접 면담장에 나서겠다고 연락이 왔다. 유가협은 면담 내용에 따라 항의집회를 지속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하고 면담을 받아들였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에 이어 유가협 회장을 맡고 있는 배은심과 손종필 사무국장, 의문사 유가족 10명가량이 경찰청에 들어섰다. 경찰청에선 청장과 함께 보안국장, 서대문경찰서장이 와 있었다. 서대문경찰서장은 장교 앞에 선 이등병처럼 자세가 반듯했다. 청장실에 들어선 박정기가 창밖을 내다보니 유가족들이 시위를 벌이던 정문 앞이 훤히 내다보였다. 유가족들은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렇게 뻔히 보이는 곳인데…. 열흘씩이나 뙤약볕과 장대비를 맞아가며 우리가 몇날 며칠을 고생했습니까? 이 자리에서 팔짱 끼고 내려다보는 마음이 편했습니까?”

경찰청장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유가족들에게 사과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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