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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422일간 계속될지 모른채…의문사법제정 농성돌입 / 박정기

등록 2012-04-22 19:41

1998년 11월4일 유가협은 서울 여의도 국회 건너편에 천막을 치고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등 피해자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사진은 농성 365일째로 1년이 넘도록 법 제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1998년 11월4일 유가협은 서울 여의도 국회 건너편에 천막을 치고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등 피해자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사진은 농성 365일째로 1년이 넘도록 법 제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98
1998년 7월 중순 박정기 등 의문사 유가족 대표들을 맞은 경찰청장은 배석한 서대문경찰서장에게 재촉했다.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의도치 않게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연행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유가족들이 사과를 받아들인 뒤 밖으로 나왔을 때 경찰서 관계자가 손종필에게 봉투를 건네었다. 손해배상금이었다. 박정기가 봉투를 확인한 다음 웃으면서 말했다.

“돈이 부족하데이. 더 달라고 해라.”

그는 이때 일을 회상할 때마다 “돈을 더 받아냈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경찰청 항의집회를 마무리한 유가협은 국회의원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여야 의원들이 함께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등 피해자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특별법 제정에 나선 김근태·천정배·유선호·이부영 등 65명의 의원은 9월15일 기자회견을 열어 그 취지를 설명한 뒤 국회에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 특별법’을 청원했다. 10월21일 김대중 대통령은 유가족을 초대한 오찬에서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당과 청와대가 협조해 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후 법 제정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11월3일 연세대에서 유가협 임시총회가 열렸다. 전국의 유가족들이 모여 농성을 결의하는 자리였다. 몇몇 회원들은 여의도 농성을 주저했다. 장기화했을 때 농성자금이 넉넉하지 않은데다 육순 칠순의 연로한 지방 유가족들이 농성에 합류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은 정기국회가 끝나는 11월 말, 아무리 늦어도 연달아 열리는 임시국회가 끝나가는 12월 말엔 농성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무려 422일간이나 농성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가협은 여의도로 향했다.

11월4일 진눈깨비가 내렸다. 유가협은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 당사 앞에서 선포식을 열었다. 89년 기독교회관 135일 농성 이후 9년 만에 다시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선포식을 마친 뒤 국회 정문 맞은편 국민은행 건물 앞에 기습적으로 천막을 설치했다.

추모사업회의 젊은 활동가들과 아버지들이 설치작업을 하자 은행 경비원과 청원경찰이 나와 막았다. 서로 부딪히는 과정에서 흥분한 박정기가 청원경찰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다음날 보니 그의 눈두덩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보도블록 위에 스티로폼을 깔고 커다란 천막 두 개와 작은 천막 하나를 세웠다. 유가협 사무국은 작은 천막 안에 컴퓨터를 들여놓고 농성장을 지켰다. 유가족들은 전기장판을 깔고 담요를 덮고 잤다. 계절은 겨울에 접어들었다. 한강의 언 바람이 천막 비닐을 흔들며 매섭게 불어왔다. 밤이면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피해 서로 끌어안고 잠들었다. 잠들 무렵이면 누군가 말했다.

“엄마, 내 옆구리가 틀어지니까 엄마가 다리 좀 틀어주면 이쪽으로 돌아누울게.”

수백날을 웅크리고 잠들어서인지 농성 회원들은 이후 몇년이 지나도록 옆구리가 아팠다. 비가 내리면 천막 틈새로 물이 샜다. 몇 차례 보수를 하다 보니 나중엔 판잣집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천막 앞에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농성 □일째”라고 글씨를 적고 매일 숫자를 더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는 얼굴을 다친 청원경찰에게 사과했지만 그 일이 빌미가 되어 은행 건물의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여의도공원까지 오가며 공중화장실을 이용했다. 외풍이 심한 천막 안에서 자고 난 아침, 공원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할 때면 몸이 얼얼했다. 한달쯤 지난 어느날 경비원들이 찾아와 보더니 건물 지하의 탕비실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때부터 탕비실의 따뜻한 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전기는 가로등에서 끌어다 썼다. 가로등 불이 켜지면 농성장의 불빛이 켜졌고, 가로등 불이 꺼지면 농성장 불빛도 꺼졌다. 한전 직원들이 찾아와 전기를 끊으면 다음날 다시 연결했다.

유가족들은 국회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시작했다. 박정기는 이소선·배은심·허영춘과 함께 국회를 드나들며 정치인과 의원들에게 법 제정을 재촉했다. 그런데 일단 국회 정문 안으로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를 않았다. 그럴 때면 손종필 사무국장이 의원회관 어딘가를 점거하고 시위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찾아나서곤 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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