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공부가 ‘문제 해결 활동’이라는 점에 숨겨져 있다. 바로 풀고 싶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문제가 없으니 해결할 것이 없고, 그래서 문제를 풀기 위해 익혀야 할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지 않고, 따라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없을까? 문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풀 수 없다는 ‘공백’, ‘틈’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틈을 느껴야 호기심이 생기는데 말이다. 틈이 실제로 거기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의 트릭’으로 그 틈을 꿰매어 붙여버리기 때문, 즉 ‘봉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빛은 왜 도자기는 통과하지 못하는데 유리는 잘 통과할까?’라는 의문이 생겼다고 해보자. 그러자 누가 “이 바보야! 도자기는 불투명한데 유리는 투명하니까 그렇지”라고 얘기를 한다. 그럼 답이 된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유리를 ‘투명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어? 원래 질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문법적으로는 ‘~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어서 설명이 되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다른 언어로 대체한 것일 뿐이다.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호기심이 왕성하다. 그런데 어른들이, 점점 깊어져 가는 규칙을 이야기해주는 대신 이리저리 이름을 갖다 붙여 더 이상의 탐구를 막아버리는 일이 오랜 시간 계속되다 보면, 아이들도 그 버릇을 배운다. 사태와 사물에 이름을 달리 붙이는 것만으로 해결이 다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습관이 착 달라붙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은, 세계의 작동을 점점 더 깊이 있게 설명하는 규칙과 그 규칙의 적용법이 아니라 단지 산처럼 쌓여 있는 이런저런 이름들뿐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당연히 호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공부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실제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 예를 들어 법률가들조차 이런 봉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대학생을 제외한 일반인이 과외교습 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위헌이다’라는 헌법재판소 결정(98헌가16)이 있다. 그런데 이 결정에 대해 “과외로 인해서 교육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어 평등이 훼손되고 있다. 그러니 이 경우는 평등과 관련된 공익이 과외를 하거나 받는 자유에 우선해야 한다”고 누군가 비판한다고 해보자. 다른 한편에서는 “아니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결정을 옹호한다. 또 다른 사람은 “자유와 평등은 상호 충돌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상호 보완 관계에 있기도 하니 균형을 잘 잡으면 된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공박을 백년 주고받아도, 결국 자기가 즉각 끌리는 대로 결론을 내게 된다. 규제가 타당한지의 문제에 대해 한쪽 저울에는 ‘공익’을 놓고, 다른 쪽 저울엔 ‘기본권’을 놓고 자기 마음대로 무게를 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런 해답에 완전히 만족해버리면 그것보다 덜 자의적이고, 더 체계적인 원칙을 탐구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현재의 지식에 틈이 있는데도 봉합을 하게 되면 모순점이나 충돌이 생기고,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답만 나온다. 당연히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질문에 답하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태에 맞닥뜨리면 ‘불만’을 강하게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를 추동하는 중요한 힘이다. 이한 <이것이 공부다>·<너의 의무를 묻는다> 저자
<한겨레 인기기사>
■ “MB취임 5일전 007가방 3개에 1억씩 담아 전달”
■ 봉하마을 묘역, 세계 최대 건축잔치 초청받았다
■ 손학규 “반성없이 돌아온 참여정부” 문재인 비판
■ 사람답게 살고 싶어 고릴라 탈 쓴 ‘아이러니’
■ [화보] 보령머드축제 ‘머드탕’으로 풍덩!
■ “MB취임 5일전 007가방 3개에 1억씩 담아 전달”
■ 봉하마을 묘역, 세계 최대 건축잔치 초청받았다
■ 손학규 “반성없이 돌아온 참여정부” 문재인 비판
■ 사람답게 살고 싶어 고릴라 탈 쓴 ‘아이러니’
■ [화보] 보령머드축제 ‘머드탕’으로 풍덩!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