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대우조선해양이 실시한 고졸 신입사원 공채에 응시한 학생들이 면접과 적성검사 등을 받기 위해 기다리며 준비해 온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선천적이 아니라 주변 환경의 영향 받아 후천적으로 길러져
갈수록 ‘뛰어난 능력’보다는 ‘남과 조화하는 능력’이 더 중요
갈수록 ‘뛰어난 능력’보다는 ‘남과 조화하는 능력’이 더 중요
인간의 능력은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영화 <대역전>(원제 Trading Places)은 이 주제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로 유명하다. 진부하기 쉬운 논쟁인 유전론과 환경론을 재미있게 풀어나갔기에 1980년대에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증권중개회사를 경영하는 대재벌 듀크 형제 랜돌프(랠프 벨러미)와 모티머(돈 어미치)는 달랑 1달러를 걸고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위험한 내기를 한다. 즉, 밑바닥 인생을 사는 흑인 거지 빌리(에디 머피)와 앞날이 밝은 듀크 회사 전무 루이스(댄 에이크로이드)의 직업을 서로 바꿔버린 것이다.
한 사람은 미천한 흑인 거지가 중역 일을 할 수 없다며 유전론을 지지하고, 다른 한 사람은 환경론이 맞으므로 흑인 거지도 중역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환경론과 유전론 논쟁에서 승패를 가리기 위해 실제 두 사람의 인생을 걸어 금지된 실험을 한 셈이다.
그 결과 갑자기 마약 거래범으로 체포되어 거지 신분으로 전락한 루이스는 재기하려고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한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한다. 반면, 거지에서 갑자기 증권중개인으로 변해버린 빌리는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하여 상류사회에 진입한다. 나중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듀크 형제에 의해 놀아난 것을 알고 힘을 합쳐 멋지게 복수한다.
적성보다 적응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직업진로와 관련해 시사점이 있다. 즉 타고난 적성보다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직업적성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필자의 주장과 관련한 근거는 많다.
첫째, 메디치 효과라는 게 있다. 중세에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이 문화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후원하자 자연스럽게 이질적 집단들이 모여들었다. 이 이질적 집단 간 교류와 융합을 통해 르네상스라는 창조적 시대가 열린 데서 메디치 효과라는 말이 유래했다. 메디치 효과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들이 결합하여 뛰어난 결과를 만들거나 창조적 작품을 창출하는 걸 말한다.
메디치 효과는 기술융합이 각광받는 오늘날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만의 탁월한 능력으로 성과를 발휘하기 어렵고, 공동체적 활동을 통해 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건 타인과 불화하는 탁월한 능력보다는 조금 수준이 떨어질지라도 공동작업 속에서 남과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다. 어떤 성과를 위해서 특정한 직업적 적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능력을 함께 가질 걸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 직업 적성도 하다 보면 길러지므로 이른바 타고난 적성은 맹신할 게 못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성에 맞아서 현재 일을 시작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하다 보니 직업 적성이 생겼다. “나는 피 한 방울만 봐도 소름이 끼치는 성격이므로 의사가 될 수 없어”라고 말하는 학생이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던 학생들도 의대에 진학하면 대개는 교육을 받으며 적응하고 의사가 된다. 처음부터 해부실습을 좋아하는 학생은 거의 없지만, 해부실습을 못해서 자퇴하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기자와 연구원, 비슷한 점 많다
셋째, 직업 간에 공통부분이 크게 존재한다는 것도 적성의 의미를 감소시킨다. 사실 직무분석을 해보면, 직업인들의 일상생활에 비슷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기자와 연구원은 하는 일이 많이 다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유사성이 높다. 기자는 문장력이 중요하지만 연구원도 문장력이 중요하다. 기자도 취재비나 출장비 처리라는 행정업무를 하고 연구원도 연구비 처리를 위해 행정업무를 한다. 기자가 전화나 이메일로 취재원을 섭외하듯, 연구원도 연구에 필요한 전문가를 섭외한다. 기자는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검색을 하고 연구원은 연구를 위해 자료를 검색한다.
직무 수준에 따라 요구되는 능력이 달라진다는 점도 적성검사의 의미를 초라하게 만든다. 직업 적성이라는 건 관리자가 되면 크게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토목설계엔지니어를 예로 들어보자. 이 사람들은 입사 뒤 기초적인 업무를 익히다 3년 정도 있으면 대리, 9년 정도 지나면 과장 직급을 달고 토목설계 가운데 한 분야에서 일을 맡는다. 도로 설계, 항만 설계, 터널 설계, 공항 설계, 댐 설계, 상하수도 설계 등 자신의 전문 분야가 생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터널 설계를 맡은 사람은 터널만 설계한다고 봐야 한다.
이 단계에서 요구되는 직무 능력은 적성검사에서 말하는 능력과 가장 일치한다. 하지만 부장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설계 능력보다는 관리 능력이 중요해진다. 기술이사쯤 되면 직접 설계를 하지는 않을 것이며 영업 능력을 발휘해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게 중요한 업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적성검사가 말하는 직업 능력은 관리자급에는 적용하지 못한다. 어느 업종이든 상급자의 경우 ‘보고 검토’ ‘결재 처리’ ‘프로젝트 수주’ ‘직원 관리’ 등의 일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평범한 직장인에게 적성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공부하라”는 부모의 잔소리에는 자식을 평범한 사람이 아닌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적성이 중요하다”는 말에는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라 성공한 1%의 직업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지 않을까?
평범한 사람에게 적성 찾기라는 허울 좋은 프로젝트보다는 일관되게 가질 수 있는 흥미가 중요하다. 영어 단어에 ‘Acquired Taste’라는 말이 있다. 후천적으로 얻는 기호나 취미를 말한다. 내게 입맛에 맞는 음식이라는 게 처음부터 존재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길러지는 게 더 많다. 필자의 경우 초등학교 때까지 양파를 싫어했다. 그러나 머리가 좋아진다는 부모님의 말에 억지로 참고 먹기 시작했다. 지금은 생양파 하나 정도는 그냥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게 됐다.
2011년 8월에 열린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의족을 달고 출전해 화제를 모았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신체적 적성이 맞아서 육상선수가 되었을까? 육상선수로서의 신체적 적성은 최악이었던 피스토리우스는 적성보다 흥미와 노력, 적응이 더 중요함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이다. 입맛이 얻어지듯이 적성도 얻어진다.
직업적성보다 일관된 흥미가 더 중요
인류의 역사는 적응의 역사이기도 하다. 선사시대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검치호랑이, 큰 뿔을 가진 매머드 등 사이에서 인류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날카로운 이빨도, 추위를 피할 두꺼운 피부도 없는 인류가 어떻게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을까? 역사 이래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과 멸종한 종의 차이는 뭘까?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선천적으로 강한 종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변화에 잘 적응하는 종이었기 때문에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직업과 진로라는 문제를 푸는 데에도 큰 힌트를 준다. 바로 적성보다 적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가지고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특출난 자기능력’을 발견하려 하지 말고, 삶의 목적을 가치 있게 설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천재와 같은 능력은 없을지라도 분명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높은 직업적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진로라는 부분에서 적성을 너무 강조해왔는지도 모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직업진로자격연구실 연구원 <톡 까놓고 직업 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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