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공부는 너무 어려워. 난 공부에 소질이 없나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좀 이상하다. 물론 사람은 다양하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키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사 공부의 ‘소질’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정도의 차이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니다. 이 말의 이상한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공부는 모든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이다. 어떤 분야에도 흥미나 재능이 0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의미가 통한다. “공부가 어려워 죽겠다”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주눅이 들 정도로.
주눅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부를 하게 되면 간단하고 관행적인 문제부터, 복잡하고 창의적인 문제까지 단계적으로 다루게 된다. 공부하면서 계속 질문은 바뀌게 되고, 그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단계가 높아지는 것은 단순히 다루는 정보가 양적으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더 깊이 있고 폭넓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규칙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아직 공부가 덜 된 상태에서 단계에 맞지 않는 문제를 푼다면 자신이 제대로 익히고 이해하지도 않은 규칙을 사용할 것을 요구받는 셈이다. 누구나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이건 대단히 명백한 이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이 이치를 잊는다.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를 보면, 작곡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린 주인공이 악보 사용법을 처음 익힌 후 척척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모차르트 같은 천재는 한 번 만에 뭐든 잘하지. 그런데 저 아이도 엄청난 천재야”라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모차르트도 장시간 집중적으로 단계를 밟아 음악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작곡을 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곧바로 작곡을 하는 사람은 지구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결국 공부는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서 새것을 배워 토대를 더 탄탄히 할수록 ‘덜’ 어렵다. 속도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조금 느리게 배운 사람이 더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훌륭한 교육 스케줄은, 배우는 사람에게 흥미와 흥분을 끌어낼 정도로는 어렵지만 좌절이나 실망을 느낄 정도로는 어렵지 않도록 짜여야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흥미와 소질이 다르기 때문에, 배우는 분야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분야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속도가 같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같은 연도 출생이라는 이유로 같은 공간에 몰아넣고 동일한 시간 동안, 같은 진도로 여러 과목을 배우게 하면 당연히 ‘어려워서 죽겠다’고 하는 이들이 속출할 것이다. 이 또한 당연한 이치다. 이 지점에서, 지금의 교육제도가 과연 구성원들이 잘 배우는 것에 정말 관심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학생들을 쪼아대는 겉모습 때문에 학교는 반복과 훈련의 장소라고 오해받고 있다. 실제로 학교는 반복훈련을 시켜주지 않는다. 어김없이 기계처럼 진도를 나갈 뿐이다. 왜냐하면 같은 진도를 나가야지만 ‘성적 딱지를 매기는’ 중간평가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행정적 편의를 위해 마련된 장치가 부과하는 어려움은 공부 본연의 어려움이 아니다. 교육은 중간평가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대신, 배움의 스케줄을 최대한 개별화시켜, 충분히 그리고 풍부하게 반복 훈련할 기회를 줘야 한다. 공부를 정말로 돕고자 한다면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것이 공부다>·<너의 의무를 묻는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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