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을 맞아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직동 서울 시립 어린이도서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책을 읽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초등학교 6학년 강힘찬군의 도서관 가상 체험기
2005년 8월8일. 날씨 더움. 드디어 여름 방학인가 했는데, 어느 새 개학 날이 멀지 않았다. 밀린 잠 좀 자고, 텔레비전 보며 빈둥거리고, 캠프 두어 군데 다녀온 뒤 휴가 맞은 부모님 따라 바닷바람 한 번 쏘였는데 몇 주가 훌쩍 흘렀다. 이만하면 ‘방학을 맞는 즐거움’은 꽤 누린 셈이니 밀린 숙제나 좀 해 볼까나. “미리 계획을 세워 알찬 방학을 보내라”셨던 교장 선생님 말씀도 새삼 생각난다. 알·찬 방학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도서관이지. 집 근처에 도서관이 하나 있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서울 시립 어린이도서관이다. 열람실 문을 여니 귀여운 여자 아이 둘이 열심히 책을 보고 있다. 마포 성산초등학교 3학년인 허예린과 진명화. 대여섯 권의 동화 책을 쌓아 놓고 ‘그림 일기’를 그리고 있다. 책을 보고 난 소감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학 숙제란다. “이 많은 책을 다 보면 안 지겨워?” 하고 물으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재밌을 것 같아서 골랐는데.” 두 아이는 같은 책을 보고 각자 그림을 그린 뒤 그림 일기를 서로 바꿔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옆 책상에서는 명화의 동생 우영이가 엄마와 공룡 그림책을 보고 있다. 우영이는 공룡을 좋아해서 도서관 어디에 공룡책이 꽂혀 있는지 다 안다고 했다. 올해 일곱 살밖에 안 된 우영이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찾을 줄 아는데 나는 뭐냐. 방학 숙제에 필요한 백과사전이 어느 구석에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열람실은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빈 자리가 별로 없다. 초등학교 4학년인 유준상 옆에 앉았다. 평창동에 사는 준상이는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방학 때는 일주일에 두 번씩 도서관에 왔단다. 이번 방학에는 도서관이 마련한 ‘독서 교실’에도 참가했단다. “책 읽는 것도 지겨운데 무슨 독서 교실까지 하냐”고 물으니 반대편에 앉아 있던 꼬마가 끼어든다. “여기 만화책도 얼마나 많은데. <수호지>도 있고 <삼국지>도 있어.” 너는 누구냐. 채희창?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녀석이 감히 형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마당 나무 밑에서 도시락 먹으면 기분 짱이야.” 사서 선생님께 백과사전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선생님이 책 분류 목록 표를 보여 주면서 한 가지씩 설명을 해 줬다. “숙제만 하지 말고, 재미있는 책도 찾아서 읽어라”고도 하셨다. 난 재미있는 책을 골라 본 적이 없다. 책은 엄마가 알아서 사 주거나 빌려다 준다. 그 책들도 실은 엄마가 고른 게 아니다. ‘권장도서 목록’이라는 게 있는데,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라 꼭 읽어야 한다는 거다. 지난 겨울 방학은 정말 끔찍했다. 도서관에서 한 사람당 다섯 권씩만 빌려 주니까, 엄마는 식구 수대로 대출증을 만들어 ‘권장 도서’를 스무 권이나 한꺼번에 빌려왔다. 나는 내가 권장 도서를 다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애들은 어쩌나, 생각하면서 책 표지만 뒤적거리다 말았다. 사서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 갖다 드리라”며 얇은 책을 한 권 준다. “도서관은 아이들의 평생 독서 습관을 길러 줄 수 있는 훌륭한 교육 공간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책을 골라 보면서 도서관에서 놀게 하세요. 책 읽기가 싫어지면 밖에서 놀다가 또 읽고, 오늘 다 못 읽으면 내일 읽어도 됩니다. 자기가 고른 책에 대해 ‘재미 있다, 없다’를 스스로 생각하게 되면, 아이는 저절로 책과 친해집니다.” 원, 뭔 소린지. 백과사전을 찾아 숙제를 하다가 지겨워서 <파브르 곤충기>를 좀 봤다. 오늘 못한 숙제는 내일 또 와서 하면 되겠지. 아까 선생님이 준 책에도 그렇게 써 있었잖아.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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