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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88 선언’ 발표 전 정부로부터 수정 압력받아 / 오재식

등록 2013-04-25 19:42

1988년 4월25일부터 인천 송도에서 열린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사진)를 계기로 한국교회협의회의 통일위원회는 ‘통일백서’ 발간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권은 발표 직전 원고를 빼돌려 수정을 압박했으나 오재식은 거부했다.
1988년 4월25일부터 인천 송도에서 열린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사진)를 계기로 한국교회협의회의 통일위원회는 ‘통일백서’ 발간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권은 발표 직전 원고를 빼돌려 수정을 압박했으나 오재식은 거부했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9
1986년 12월 인천 송도에서 열린 ‘평화통일에 관한 협의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통일백서’ 기초위원회는 그동안 진행된 토론과 제안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한 줄의 문장, 아니 단어 하나까지도 심사숙고해야 했기에 기초위원들의 손길도 날카로워졌다. 9명의 기초위원들도 각자 성향이 다른 터라 초안 문안을 놓고 논쟁하다 “왜 이런 말을 쓸 수 없느냐”며 방문을 박차고 나가는 이도 있었다. 물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내부에서는 ‘남북통일’이나 ‘평화통일’을 자연스럽게 주장할 수 있는 분위기였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어서 문안은 한 자 한 자 세심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런데 송도 협의회에서 제기된 ‘미군 철수’ 문제를 백서 초안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오재식도 난감했다.

그런 와중에 재식은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시프리)를 탐방할 기회가 생겼다. 시프리는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분쟁 방지와 지역안보, 무기 억제와 군비 축소, 핵확산 방지 등을 연구하는 세계적 권위의 전문기관이었다. 재식은 시프리의 전문가와 마주 앉아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한 백서를 준비중인데 ‘미군 철수 논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조언을 요청했다.

그 전문가는 국가안보는 영토 내의 안보도 있지만 영토 밖에서도 필요한데, 한반도는 지금 영토 밖에서 타깃이 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오래전부터 논의중인 유럽 통합을 위한 헬싱키 프로세스에 따라 소련이 동베를린에 있던 미사일(SS20)을 동시베리아로 옮겨 한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덧붙여 미군 잠수함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소련의 미사일 대신 핵을 실은 미군 잠수함이 한반도 주변 공해에서 떠다니고 있다. 잠수함은 절대로 혼자 떠 있지 못한다. 반드시 육지의 기지와 연락해야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잠수함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반도 밖에서 한반도를 타깃으로 하는 군사력까지 모두 철수시켜야만 비로소 안보가 확보될 수 있다.”

재식은 시프리의 조언을 듣고 돌아온 뒤 ‘미군 철수를 위한 전제조건을 정리해 넣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한반도 안에 있는 핵무기는 물론 한반도 밖에서 겨냥하고 있는 무기들도 철수시킨 뒤 한반도 전역에 걸친 평화와 안정이 보장될 때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까다로운 논쟁점들을 하나씩 조율해 가면서 기초위원들은 모든 내용을 지독할 정도로 꼼꼼하게 정리했다. 백서를 준비하는 14개월 동안 10번 넘게 모이면서 꼬투리 잡힐 만한 빈틈이 없도록 확인 또 확인했다.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글에도 힘이 있어야 하고, 진실된 마음과 희망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문체도 꼼꼼히 살펴 여러차례 퇴고했다.

일일이 손으로 쓰거나 타자기로 친 다음 필요한 내용을 따다 붙여서 전체 문안을 만드는 복잡한 작업을 거쳐, 최종 원고는 서광선 교수가 정리했다. 그 원고는 성서공회 편집부의 손을 거친 뒤 재식의 손에 들어왔고, 이를 교회협의회에 제출해 우선 얇은 책자로 만들었다.

마침내 88년 1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 전문이 완성되었다. 선언문은 2월에 열릴 교회협의회 총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발표도 하기 전에 문화부에서 종교를 담당하는 종무실장이 재식을 불렀다. 시내 코리아나호텔로 나갔더니 그의 손에 이미 ‘88선언’의 최종 원고가 들려 있었다. 철저한 보안을 지킨다고들 했는데, 어디선가 새어나갔던 것이다. 그는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이 12개나 그어진 원고를 내밀었다.

“당신들이 이런 거 하는 거 우리가 다 압니다. 지금 경찰이 나한테 와서 야단인데, 내가 일단 경찰을 막아놨어요. 그러니 여기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있는 12가지 대목은 다 빼거나 고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이고, 여기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요.”

재식은 일단 그에게 잘 알겠고, 위원들과 의논해 보겠다고 답한 뒤 원고를 받아들고 나왔다. 등 뒤로 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말 단단히 들으시오!”

하지만 재식은 그 사실을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 없었다. 한동안 원고를 들여다보던 그는 한순간 원고를 뒤집어 서랍 속에 넣어 버렸다. 혼자만 알고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는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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