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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평화통일 담은 ‘88선언’ 만장일치 채택 / 오재식

등록 2013-04-28 19:32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8년 2월29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통일위원회에서 작성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왼쪽 사진은 당시 ‘88선언’을 눈물로 낭독한 연동교회 당회장 김형태 목사. 오른쪽은 ‘88선언’ 문안을 집필한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2010년 공개한 원고의 표지로 통일백서 기초위원 9명의 서명이 보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8년 2월29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통일위원회에서 작성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왼쪽 사진은 당시 ‘88선언’을 눈물로 낭독한 연동교회 당회장 김형태 목사. 오른쪽은 ‘88선언’ 문안을 집필한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2010년 공개한 원고의 표지로 통일백서 기초위원 9명의 서명이 보인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80
1988년 2월29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 선포됐다.

오재식은 앞서 1월초 사임한 김소영 총무를 대신해 총무 대행 자격으로 교회협의회 의장인 성공회의 김성수 주교 옆에 앉아 총회를 주관했다. 마침내 김형태 목사가 통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선언서를 낭독했다. 김 목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한마디 한마디 읽어나갔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쪽에서는 통곡 같은 울부짖음도 들렸다. 낭독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치며 만장일치로 ‘88선언’을 가결했다. 이로써 88선언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해 신학적·정책적 정의와 교회의 나아갈 길을 밝혀 한국 교회의 공식 지침으로 자리매김했다.

88선언은 첫 부분에서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의 예를 들어 한국 교회가 출발부터 평화선교를 내세웠다는 역사적 사실부터 밝히고 있다. 또한 ‘평화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분단과 갈등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음을 밝히며, 그러한 평화를 위해서는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해 증오와 적개심을 품는 것이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고백하는 ‘죄책고백’으로 이어진다.

‘통일정책과 통일원칙의 장’에서는 72년 남북 최초로 합의해 발표한 ‘7·4남북공동성명’에 나타난 자주, 평화,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대단결의 3대 정신을 지지하며, 더불어 최우선적으로 인간적 삶을 배려해야 한다는 인도주의 원칙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명시했다.

또한 휴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바꿔 다시 체결하고 그런 다음 남북 상호간에 신뢰회복이 확인된 뒤 한반도 전역에 평화와 안정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을 때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하며, 한반도에 배치됐거나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모든 핵무기는 철거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물론 안기부에서는 88선언의 내용을 철저하게 검토하라는 비상지침을 내렸으나 끝내 아무런 꼬투리도 잡지 못했다. 담당 요원조차 “대단한 내용입니다. 완벽해요. 우리가 손댈 부분이 없습니다”라고 상부에 보고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 덕분에 88선언을 작성한 기초위원 9명 누구도 해를 당한 사람은 없었다. 그즈음 교회협의회에 입수된 안기부의 사찰문건에는 재식을 ‘조직의 귀재’라고 적어 놓기도 했다.

재식은 88선언의 발표에 앞서 또 한가지 일을 벌여놓았다. 4월25일부터 인천 송도에서 통일을 주제로 한 국제회의를 연다고 미리 발표한 것이다. 바로 ‘세계기독교 한반도평화협의회’였다. 어쩔 수 없이 나라 밖에서 시작해야 했던 첫번째 통일 논의의 장, 도잔소 회의를 마침내 국내에서 여는 셈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와 전임 총무인 필립 포터가 내한하는 등 외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에서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국외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해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회의가 끝난 뒤 체포하기로 했다는 ‘첩보’가 재식에게 들어와 아연 긴장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회의 기간 동안 진행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야당인 평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정권 쪽 태도가 확 바뀌었다.

당시 이홍구 통일원 장관은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비기독교인 회원으로서 서광선 교수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서 교수에게 통일원의 국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88선언에 대해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3시간가량 진행된 강연을 들은 뒤 통일원 간부들도 ‘88선언’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91년 12월 노태우 정권에서 발표한 남북기본합의서에도 상당 부분 88선언의 내용이 반영됐을 정도였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88선언은 그해 9월 열린 제2차 글리온 회의에서 발표한 ‘남북공동선언문’으로 이어졌다. 선언문에는 남북의 교회 대표들이 공동으로 죄책고백을 하고 해마다 8월15일 직전 주일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공동 기도 주일로 지킨다는 합의가 들어 있었다. 바로 ‘글리온 선언’이다. 이는 89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협의회의 중앙위원회에서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정책에 관한 성명서’를 채택하는 데까지 진전되었다.

80년대 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신앙고백과 죄책고백의 자세를 지킨 한국교회협의회와 기독인들의 노력으로 잊혀가던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문제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뚜렷한 과제로 설정된 것이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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