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경기도 고양시에 자리잡은 국립여성사전시관 상설전시관에서 김혜숙 학예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으로 만든 소녀상을 설명하고 있다.
국립여성사전시관 교육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여성사 관련 기록 모아 전시
올해 서울서 경기 고양으로 이전
양성평등교육 일환으로
어린이·청소년 프로그램 열어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여성사 관련 기록 모아 전시
올해 서울서 경기 고양으로 이전
양성평등교육 일환으로
어린이·청소년 프로그램 열어
1898년 9월1일. 조선 사회에서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북촌 여인들로 결성된 단체 찬양회에서 ‘여권통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이었다. 당시 <황성신문>에 게재된 이 선언문에서 여성들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 직업을 가질 권리,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이후 찬양회 회원들은 왕에게 여학교를 설립해달라고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일부 보수파의 반대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비를 걷어 직접 ‘순성여학교’를 만들었다. 순성여학교에선 기본 서당교육을 비롯해 서양의 역사 등을 가르쳤다. 여성들은 교사, 간호사, 버스안내원, 직공 등 직업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회참여를 했다.
그로부터 116년 뒤인 2014년. ‘오늘’을 사는 학생들은 ‘여성의 권리’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지난 4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 국립여성사전시관 교육실. 이 지역 화정고 1학년 학생 20여명이 ‘다시 쓰는 여권통문’이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들은 여권통문의 발표 배경과 당시 시대적 상황부터 살펴봤다.
“미래의 주인공이 될 우리는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학생·여성·자식·친구·이성친구로서의 권리 등 우리가 지켜내야 할 권리에 대해 써봅시다.” 김혜숙 학예사의 설명이 끝나고 학생들은 조별로 여권통문을 작성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직장 동료가 여직원에게 ‘애를 셋이나 낳아서 팀 업무에 방해가 된다’는 얘기를 하더라.”
“얼마 전 기사를 읽었는데 간호사들은 팀별로 돌아가면서 임신해야 한대.”
“미친 거 아니야?”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거지. 어떤 회사는 직원이 임신을 하니까 아예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대.”
학생들은 논의 끝에 ‘남성들도 의무적으로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남자들이 애를 봐주면 그만큼 여성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뜻에서다.
다른 조에서는 남녀관계와 관련한 편견을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남녀가 사귀다 깨지면 여자한테만 손해다”, “헤어지고 나면 남자는 ‘카사노바끼’가 있다거나 ‘능력 있다’고 평가를 받지만 여자는 ‘더럽다’고 소문이 난다”, “둘이 함께 사고를 쳤는데도 임신한 여자애만 퇴학당한다. 만약 낙태를 해도 직접 몸이 망가지는 건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만 피해를 본다” 등 학생들은 거침없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결론은 하나로 모아졌다. “맞아. 이건 불공평해. 둘이 같이 책임을 져야지.”
학생들은 이 주제로 ‘남녀관계에서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남녀 모두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문구를 작성했다. 이들은 ‘이성교제’, ‘남녀관계’, ‘남녀 간 이성관계’ 등 단어 하나를 쓸 때도 치열하게 토론했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한 여권통문에는 ‘여성생필품 가격 조정 및 물품 지원’, ‘여성 국회의원 의무할당제’, ‘남성 역차별 금지’ 등 다양한 조항이 들어갔다. 배유빈양은 “전에 배웠던 ‘사발통문’(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참가자 명단을 빙 둘러가며 적은 통문을 이르는 말)을 적용해 여권통문을 썼는데 색달라서 재밌었다”며 “여성들을 너무 배려하다 오히려 남성들을 역차별하는 일이 발생하진 않을까 싶어 관련 조항을 넣었다”고 말했다.
2층 상설전시관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주제로 한 교육 프로그램 ‘꽃할머니 이야기’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림·소녀상·영상 등을 보고 할머니들에게 전하고 싶은 평화메시지를 직접 쓰는 식으로 구성했다. 학생들은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먹먹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았으면 좋겠다”,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제2의 위안부가 생길지 모른다.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적었다.
남정민양은 “한국사 시간에 ‘일제 강점기’를 배우며 위안부 이야기를 접했다”며 “텔레비전에서 스치듯 추상적으로만 이야기를 듣다가 자세한 내용을 오늘 알게 됐는데 직접 사건을 겪었던 할머니들의 마음이 더 와닿았다”고 했다.
“사실 그 할머니들이 그 시대에 태어나서 피해를 입은 것이지, 우리도 그 역사 속에 태어났다면 피해자가 됐을 수도 있다. 사람은 과거를 통해 배운다고 한다. 과거를 알아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날 진행한 프로그램은 지난 9월1일 국립여성사전시관(여성부 운영)이 서울 대방동에서 경기도 고양 정부고양지방합동청사로 자리를 옮기며 만든 것이다. 전시관은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우리나라 역사 속 여성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와 동시에 양성평등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 6살 이상 아동부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표 참고)
김혜숙 학예사는 “‘다시 쓰는 여권통문’ 프로그램은 이전 개관을 기념해 열고 있는 여권통문 특별전과 연계한 것”이라며 “우리 때와 달리 아이들이 이성과의 성관계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오히려 남성들의 역차별까지 생각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대부분 남성 중심, 승리 위주로 기록돼 있다. 같은 역사지만 당시 상황을 여성들이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만나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 최화진 기자 lotus57@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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