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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아무래도 우리는 잔소리가 너무 많다

등록 2005-09-25 19:08수정 2005-09-26 15:23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아무래도 우리는 잔소리가 너무 많다

교과 재량시간에는 늘 도서실에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요즘 들어 요 녀석들이 통 말을 듣지 않는다. 만화책이어도 상관없다고,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뽑아서 읽으라고 하는데도 삼삼오오 서가에 모여 노닥거리거나, 책 사이에 휴대폰을 숨겨서 문자를 날리고 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몇 녀석들을 불러내어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고야 말았다.

사안이야 어찌되었든 잔소리를 하고 나면 뒤끝이 개운치 않다. 당장은 말을 듣지 않는 ‘웬수’들을 수습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따져보면 아이들 탓만도 아니다. 왜 화가 나는가. 스스로가 무능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을 내 뜻에 따라 행동하게 할 능력이 있다면 굳이 얼굴 붉히며 잔소리를 하고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에 알리지도 않고 하교길에 친구를 따라나선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사는 마을은 우리집에서 십 리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친구 엄마가 해주는 기름진 음식에 취해 마음껏 먹고 놀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한밤중에 누가 문을 두드려 일어나보니 아버지였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는가. 친구들에게 묻고 물어 찾아오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잠이 덜 깬 내게 말없이 등을 돌려 대었다. 그 먼 길을 되짚어 오는 동안, 아버지는 한 마디 꾸중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딱 한마디 하셨을 뿐이다. ‘밥은 먹었니?’

나는 그게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닭장문은 여몄는지, 소죽은 누가 끓였는지(내 일몫이다) 차마 묻지도 못하고 아버지 등에 얼굴을 묻었다. 논길, 둑길을 거쳐 마을로 들어서는 내내 아버지는 나를 내려놓지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엎드려 초여름 밤의 온갖 별들을 다 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당시 아버지와 엇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돌아보매 선생이 되어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말이 참 많아졌다. 잔소리도 몸에 배었다. 좀 조용히 해라. 깨끗이 치우고 살자, 양심에 털 난 거 아니냐, 어떻게 청소시간에 도망칠 궁리를 하느냐, 책 좀 읽어라… 그러나 그 누구도 잔소리를 달게 듣는 눈치가 아니다.

꾸중 끝에 짜증스런 표정으로 돌아서는 아이들이나 자식 놈을 볼 때마다 그 옛날 아버지의 등이 떠오른다. 말씀 한 마디 안 하셨어도 아버지는 등 위에서 온 하늘을 다 보여 주셨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가르친다는 이름으로 조금씩 등을 무너뜨리고 살았던 것 같다.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글자만 간신히 깨우친 아버지보다 많이 배웠고, 가난을 등짐처럼 지고 다니던 아버지보다 돈도 많이 벌지만 나는 아직 멀었다. 많이 멀었다.


이상대/서울 신월중 교사 applebighea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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