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다옥 교사의 사춘기 성장통 보듬기
“아빠가 싫어요. 아빠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집에 안 들어가고 싶어요.”
중2 1학기 어느 날 상담을 받고 싶다며 온 아이가 한 첫말과 끝말이다. 아빠의 직장 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기면서 문제가 된 경우였다. 매일 술을 먹고 들어와서 울분을 토하는 아빠와 말을 안 섞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는, 지쳐 있는 엄마 사이에서 아이는 불안과 답답함이 목에 차올랐던 것 같다.
이 아이가 상담실에 온 이유가 뭘까? 어떤 부모님들은 가정 내 문제를 밖에서 얘기하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아이도 안다. 상담을 한다고 밀린 아빠의 월급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빠에게 새 직장이 구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상담실에 오는 건 그냥 ‘답답해서’이다. 자신의 부모는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불안과 일상의 스트레스를 들어줄 여유가 없다. 아이는 가정의 영향도 받고 있지만, 가정 외에 다른 영역의 삶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양쪽에서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만만찮게 크다.
주 1회씩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면서 아이는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나누며 조금씩 자신의 현재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보다 떨어진 성적, 기말시험에 대한 걱정과 공부의 어려움, 친구관계에서 생긴 속상함과 갈등들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그런 와중에도 가정 사정은 전혀 나아진 게 없었고, 아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라며 울기도 했다. 또 여름방학을 보내고 다시 학교생활로 돌아왔을 때 “방학보다 학교 다니는 게 더 좋아요. 애들이 있으니까. 부담을 잠깐이나마 덜어주니까”라고 말하며 많이 울었다. 그러나 2학기 학교생활은 조금 달라진 면이 있었다. 특히 어려워했던 교과목에서 눈에 띄게 성적이 향상됐고, 학교생활에서 새로운 도전도 하게 됐다.
학교에서 여러 아이를 만나면서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어도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잘 적응하거나 문제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했던 아이들의 차이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보게 된다. 문제행동을 다룰 때 ‘위험요인’(문제 발생의 위험을 증가시키는 요인)과 ‘보호요인’(문제나 위험요인에 대한 면역을 키우고 위험요인의 영향을 최소화시키는 요인)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하는데, 이 두 요인은 각각 지능이나 태도·행동 경향 등의 개인 요인, 가족 요인, 또래 및 학교 요인, 사회환경적 요인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아이의 경우 아버지의 실직과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 부부간 불화, 가족 구성원의 장애와 질병, 시험성적 부진 등이 위험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보호요인으로는 유년기에 있었던 부모의 안정적인 사랑과 인정, 거기서 비롯된 긍정적인 자존감, 부모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관심, 아이에 대한 부모의 신뢰와 기대, 성실한 태도, 잘해내고자 하는 높은 성취동기, 이어진 성취경험들, 원만한 또래관계와 학교생활, 교사들과의 좋은 관계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제 상황에 있는 아이를 돕는 기본 개입방향은 위험요인을 줄이고 보호요인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부모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실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부부간 불화를 개선하려는 시도, 화를 술로 풀지 않고 욕을 하지 않는 식으로 위험요인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부모 자신이 여력이 없어 모범답안 같은 행동을 취하기 어렵기도 하고, 상황도 뜻대로 잘 안 풀리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가 줄 수 있는 보호요인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의 연령 수준에 맞게 가정이 처한 어려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아이가 뭘 알겠나 싶어 아무 얘기도 않을 경우 부모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며 더 심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아이에게 부모의 부담을 전가하는 하소연의 방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모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나 걱정도 표현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모습에서 아이는 자신의 불안과 걱정에 압도되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 부모라고 완벽하고 좋은 모습만 보일 수도 없고 꼭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가진 한계와 주어진 여건에서 아이는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된다.
아이들에게 세상을 만나는 채널이 여러 개가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커갈수록 삶의 무게도 무거워지고 감당해야 할 영역도 확대됨에 따라 다양한 통로가 요구된다. 물론 가장 기본채널은 부모다. 부모와의 신뢰관계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를 확인해볼 수 있는 다른 채널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다른 채널은 친구일 수도 있고, 음악이나 종교 활동일 수도 있다. 걱정해서 막아서기보다는 허용해줄 필요가 있다. 시도해보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윤다옥 한성여중 상담교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 상담넷 소장
윤다옥 한성여중 상담교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 상담넷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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