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 학기 초 떠난 진로와 연계한 삼천포고 진로테마체험학습에서 학생들이 군포수학체험관에서 4D프레임을 가지고 체험하고 있다. 삼천포고 제공
지난 5일 경남 사천시에 위치한 삼천포고 다목적 강당. 점심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잠시 뒤 1학년 김명주군이 마이크를 들고 앞에 섰다.
“저는 리쌍의 ‘챔피언’을 소개합니다. 이 곡은 멤버 개리가 아마추어 복싱을 할 때 알게 된 최요삼 선수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최씨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도 항상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학생들은 뮤직비디오와 함께 음악을 감상했다.
수의사가 꿈인 이대희군은 헨리 맨시니의 ‘아기코끼리의 걸음마’를, 장해찬군은 ‘패신저’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진 영국 가수 마이클 데이비드 로젠버그의 ‘렛 허 고’(Let her go)를 소개했다. 학생들은 노래와 가수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곱씹을 만한 가사 내용을 설명했다.
이 학교는 지난해부터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에 ‘음악에서 길을 찾다’를 진행한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음악을 미리 신청한 뒤 짧은 메시지를 나누고 다 같이 듣는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나 꿈에 대한 관심, 이를 이루기 위한 자세 등을 담아 이야기하는 식이다. 누구나 편하게 와서 들을 수 있다. 장군은 “이 시간은 친구들이 어떤 꿈을 꾸고 생각하는지를 이해하고 서로 격려하는 자리도 된다”고 말했다.
도시에 비해 농산어촌에 거주하는 중·고교생들은 진로체험의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전문 강사를 섭외하는 것은 물론 진로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도 찾기 어렵다. 농산어촌 지역은 다양한 직업군을 찾기 어렵고 진로진학 정보를 얻는 데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지방에 사는 한 학생은 “인근 시에서 열리는 대학박람회를 개인적으로 찾거나 학교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진로진학 교육의 전부”라고 말했다.
2. 같은 기간 다른 코스로 떠난 학생들이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구체적인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삼천포고 제공
삼천포고는 지역 학교들이 느끼는 진로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분야별 진로 탐색 형식으로 수학여행을 진행하는 등 자구책 마련을 하고 있다. 2011년, 수학여행을 진로와 연계한 테마체험학습으로 바꾼 건 정호영 교장의 아이디어였다. 처음에 교사들은 반대했다. 코스별 희망 신청인원을 조절할 수 없어 버스 대절이 힘들고 지역이나 여행사가 각각 달라 정산도 따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뭉쳤다. 교사들은 인문계 4개, 이공계 3개 코스를 짠 뒤 사전답사를 했다. 코스별 설명과 활동지를 포함해 90쪽에 달하는 가이드북도 직접 만들었다. 가령, 문학 분야는 이효석, 김유정, 황순원 작가 등의 문학관과 춘천 애니메이션박물관을, 경제는 ‘살아 있는 경제 체험’이라는 주제 아래 한국거래소, 동대문 종합상가, 한국은행의 화폐박물관 등을 방문했다. ‘과학과 공학의 어울림’이란 제목의 과학 코스에선 울산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서울과학기술대학과 대전 과학관 등을 둘러봤다.
3. 지난 5일 삼천포고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음악에서 길을 찾다’ 프로그램에 참여해 함께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최화진 기자
순수하게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신청을 받다 보니 만족도는 최고였다. 건축가가 꿈인 2학년 서창희군은 수학코스를 선택했다. “건축 설계 하는 데 수학적 지식도 필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수학여행을 통해 진로와 관련한 정보를 얻고 조금이나마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서군은 처음 가본 경기도 분당에 있는 종합직업체험관인 ‘잡월드’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를 선택해 캐드 프로그램을 사용해봤다. 그는 “이 주변에는 실질적 정보를 얻을 곳이 많이 없는데 간단한 체험이라도 해보는 것과 안 해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또 “반별로 가는 게 아니라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귈 수 있고 관심 분야가 같다 보니 공감대 형성도 잘되어 정보공유도 했다”고 말했다.
학교는 지역의 특성을 적극 살린 진로교육도 하고 있다. 2011년부터 ‘우리 고장의 자원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으로 진로 동아리별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 시에 기부했다. 올해는 지역에 있는 ‘봉명산’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자신의 진로와 관련한 세부 주제를 정하게 한 뒤 소논문을 쓰게 했다. 법률동아리에서 활동 중인 정웅렬군은 ‘봉명산을 통해 본 ‘산림’에 대한 모든 것’을 주제로 연구했다. 요즘 뜨고 있는 휴양림에 관한 내용 등 전반적인 산림법을 정리했다.
김진성군은 ‘스텔라’라는 직독직해 동아리에 속해 있다. “평소 <타임>에 있는 뉴스 기사나 어려운 시사만 다뤘다. 이번 기회에 봉명산의 이름에 대한 유래, 봉우리별 특징, 등산코스를 소개하는 영어 안내서를 만들었다. 내용이 어려워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최대한 쉽게 썼다.”
지난 5일 교복을 입은 삼천포고 김성곤 교사(맨 오른쪽)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학교는 중앙현관을 리모델링해 카페 겸 상담실로 꾸몄다. 1, 2학년 교무실과 연결돼 학생들이 자유롭게 교사와 진로·진학은 물론 생활 상담을 할 수 있다. 최화진 기자
서창희군은 물리동아리에서 친구들과 ‘등산에서 마찰과 완충의 역할’을 조사했다. 등반하면서 미끄러지거나 무릎에 무리가 가는 것을 마찰과 완충의 원리를 통해 알아본 것이다. “지난해 보고서를 시장님한테 직접 전달했다. ‘본인들이 직접 해야 할 일이기도 한데, 생각지 못한 시민들의 생각을 알게 돼 고맙다’며 ‘법적 자료로도 유용하고 영어 안내서의 경우는 관광 사업 측면에서 활용 가능하니 참고해서 잘 쓰겠다’고 말했다.”
김성곤 교사는 지난 두달간 주말에 쉬어본 적이 없다. 학생들과 각종 체험학습을 다녔기 때문이다. 수학, 과학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 신청을 받아 김해에서 열리는 ‘경남중등수학체험전’, 진주의 ‘경남과학수학교육페스티벌’ 등을 다녀왔다.
그는 “학생 수에 맞춰 버스를 대절하고 자리가 조금 부족할 경우 교사들 개인차량에 태우고 이동했다”며 “평소 공문도 꼼꼼히 보고 인터넷을 뒤져서 학생들이 참여할 만한 프로그램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직접 명사를 섭외해 진로특강도 연다. 한상덕 경상대 중문과 교수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윤선주 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다녀갔다.
“아이들이 시골에서 자라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직업군을 접하거나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기 힘들다.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학원도 변변찮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의무적으로 다니다 ‘그냥’ 졸업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게 보고, 꿈과 비전을 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것저것 운영하게 됐다. 교사의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지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통로를 이용해 활발한 진로교육을 펼칠 수 있다.”
사천/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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