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학중점학교인 서울 숭의여고 학생들이 과학체험활동으로 진행한 스팀(STEAM)수업 중 미술융합과학수업을 하고 있다.
올해 중앙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 윤준호(19)군은 중학교까지 야구선수 생활을 했다. 경기 도중 허리를 다쳐서 선수생활을 그만둔 뒤 꿈이 없어 방황했다. 다시 펜을 잡고 공부를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운동하던 애가 무슨 공부냐”, “해봤자 (성적이) 얼마나 오르겠냐”며 무시했다. 그때 체육선생님이 체육중점학교를 소개해줬다.
“평소 야구뿐 아니라 인생 상담을 해주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준 선생님 덕분에 송곡고(서울 중랑구 소재)에 입학했다. 이후 나에게 힘이 되어준 선생님처럼 체육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송곡고는 일반 인문계고이지만 체육 교과를 특화해 가르치는 교과중점학교다. 학생들은 스포츠개론 같은 전문적 이론부터 육상·수상·설상 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체육수업을 두루 배울 수 있다. 윤군은 방과후로 진행한 체대입시 교육을 통해 대학에 들어갔다.
“일반 인문계고에 갔다면 암울했을 거 같다. 처음부터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집중해서 배우다 보니 오히려 공부할 맛이 났다.”
특수목적고와 특성화고 선발 경쟁률이 점점 높아지며 ‘일반고 슬럼화’에 대한 우려는 더 커졌다. 실력 좋은 학생들이 다 빠져나가고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습 의지가 부족한 학생들이 일반고에 모여 분위기가 안 좋다는 인식도 생겨났다. 이렇게 침체됐던 일반고가 변신을 꾀하고 나섰다.
일반고 내 별도 학급 운영하며
과학·예술 등 전공 집중적으로 가르쳐
‘교과중점학교’란 이름으로 전국 113곳
소논문쓰기·실기레슨 등 활동 다양
진로 명확한 학생들 입시에 도움
중간에 전공 계열 변경 어렵고
예산 들쭉날쭉 등 개선할 점도 있어
2. 숭의여고 학생들이 진로 계열별로 6개월간 프로젝트를 진행해 발표하고 있다. 숭의여고 제공
특정교과 심화 교육하는 교과중점학교 늘어
송곡고처럼 일반고 안에 따로 학급을 두고 특정 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교과중점학교는 2015년 기준 과학 100개, 예술 10개, 체육 3개로 총 113개교다. 교육부의 ‘2016년도 업무계획’을 보면 과학·예술·체육뿐 아니라 외국어·국제·사회·경제 등의 교과중점학교를 올해 200개교, 내년 300개교 늘린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현재 운영 중인 교과중점학교 자체를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는 학생과 학부모도 있다.
일부에서는 학생 스스로 원하지 않는데 추첨을 통해 교과중점학교에 강제 배정한다는 오해도 있다. 하지만 과학중점학교는 대부분 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추첨 선발하고 예술중점학교도 학교에서 선발권을 가지고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통해 학생을 뽑는다.
과학중점학교인 숭의여고(서울 동작구 소재)는 중학교 때 중점과정을 선택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건 없이 추첨해 학생을 선발한다. 현재 과학중점반은 한반 35명씩 두 학급으로 운영 중인데, 전체 수업시수 중 45% 이상을 수학·과학 등 자연계열 이수 단위로 채운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워서 선택하지 않는다는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II까지 정규 수업시간에 공부한다. 수학·과학 관련 체험활동도 50시간 이상 해야 한다.
3. 체육중점학교인 서울 송곡고는 수상ㆍ설상 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체육수업을 진행한다. 송곡고 제공
김진훈 교사는 “1년 프로젝트로 과제연구를 진행해 소논문을 쓴다. 소논문 쓰기 활동 등은 과학고나 특수목적고에서는 흔하게 하지만 일반고에서는 쉽지 않다”며 “다른 일반고에서 하더라도 실험 기자재나 실습 지원 정도가 차이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학교 차원에서 전공 관련 심화활동을 다양하게 하니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입시에서 도움이 돼 이과 계열에 관심이 있어서 온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3학년 조민주양은 “진로가 뚜렷한 친구들이 모이다 보니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대 형성도 잘된다”며 “과학교양이나 과학사, 고급화학 등 심화된 내용까지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간호사가 꿈인 조양은 의료보건 동아리를 꾸려서 의료사고에 대해 토론하거나 과천과학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진로 시간에 팀 프로젝트로 <히포크라테스의 발견>이라는 책을 읽고 발표했다. 히포크라테스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치료와 간호의 조화에 대해 강조했는데 여운이 남아서 동아리까지 만들었다.”
교과중점학교는 대부분 중점반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특별·심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지만 교과중점학교를 잘못 이해하는 일반반(문·이과 계열 반) 학생들 가운데 중점반만 특혜를 준다고 불만을 얘기하거나 일반반 교사가 중점반 교사를 시기하는 경우도 있다.
4. 체육중점학교인 서울 송곡고는 수상ㆍ설상 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체육수업을 진행한다. 송곡고 제공
한 예술중점학교 담당 교사는 “‘인문계고인데 왜 예체능 과목만 신경 쓰느냐, 나머지 교사들이 소외되는 느낌이다’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다”며 “중점학교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대학 입시에서 성과를 냈음에도 눈치가 보여 외부에 홍보하는 게 조심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산 자체가 교과중점과정을 위해 편성됐기 때문에 특정 교과의 심화교육을 위해 쓰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도 만들고 있다. 숭의여고는 이과 학생들도 소논문 쓰기나 외부체험학습 등 과학중점반 학생들과 거의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음악중점학교인 대원여고(서울 중랑구 소재)도 일반반 학생들이 원하면 방과후에 악기 레슨을 받을 수 있다. 중점반 학생들이 등교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봉사활동으로 연주회를 열어 일반반 학생들이 감상하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정치훈 교사는 “전반적으로 학교가 온화해지고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사교육비 아껴 만족하지만 예산 줄어 걱정
특히 예술이나 체육중점학교의 경우 학생이나 학부모가 가장 크게 만족하는 부분은 ‘사교육비 절감’이다. 개인적으로 사교육 업체에서 고액의 입시교육을 받아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예술 전공 학생들이 교내에서 저렴한 교육비를 내고 입시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교사는 “보통 음악 전공하는 예고 학생들이 시간당 15만원씩 주고 개인 레슨을 받는다. 한 달에 200만원은 기본이고 심할 경우 1000만원 가까이 든다는 애도 있었다”며 “우리 아이들은 방과후 시간에 3만5000원만 내면 일주일에 한번 30분씩 외부 전문 강사가 일대일 레슨을 해준다”고 말했다.
음악중점반의 커리큘럼은 예술고와 거의 비슷하다. 비올라, 바이올린 등을 가르치는 외부 전문 강사가 35명이나 있다. 정 교사는 “한 학년이 한주에 11~13시간 전공교과 수업을 한다. 음악사, 시청청음, 음악철학 등의 전공수업이 일반교과에 포함돼 있고 주요 과목은 음악대학에서 반영하는 국어, 영어 위주로 공부한다”며 “예고 입학경쟁률이 평균 1.2 대 1인 데 반해 우리는 초창기부터 꾸준히 2 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중간에 전공 변경이 안 되는 점은 학생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신중하게 진로를 고민해 교과중점학교에 입학했더라도 중간에 적성에 안 맞거나 힘들 경우 다른 전공으로 바꿀 순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같은 학교 내의 일반반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한다. 반대로 일반반에서 교과중점반으로 옮기려 해도 학교장 선발로 학생을 뽑는 학교는 전·편입 전형을 거쳐야만 한다.(대원여고의 경우는 학생이 원할 경우 일반반으로 전공이동이 가능하다.)
중점학교 교사들은 이에 대해 “해당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중점과정을 선택한 학생을 대상으로 선발하기 때문에) 합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점반을 선택한 뒤 일반반으로 옮기는 식으로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미술중점학교를 운영하는 송곡여고 송혜정 교사는 “초기에는 홍보가 잘 안돼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거나 중간에 학생이 전학가거나 운영이 잘 안돼 사업을 중단한 학교도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착을 하고 주변에도 소문이 나서 교과중점학교에 대한 만족도나 평가가 꽤 높다”고 말했다.
송 교사는 “단순히 틀에 박힌 입시지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수업에서 아이들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친다”며 “사교육비 절감은 물론 예술적 소양을 쌓을 수 있도록 아이들을 자극시키는 교육을 하는 것이 예술중점학교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교과중점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족하는 부분이 비슷한 만큼 각자가 말하는 개선점도 비슷했다. 특히 교사들은 ‘줄어드는 예산’을 걱정했다. 송 교사는 “처음 시작할 당시 교육부와 교육청의 중복 투자로 중점반 6학급당 1년에 5000만원을 받았다. 지금은 사업이 교육청으로 이관되면서 작년 전체 예산이 1억3500만원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산이 들쭉날쭉하면 외부 강사를 뽑거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없다. 사업이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예산을 꾸준히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훈 교사는 ‘일반고 슬럼화’의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 고교다양화정책으로 학생 선발권을 가진 과학고·외고·전국 단위 자사고, 권역별 자사고에서 중상위권 학생을 다 빼갔기 때문에 일반고 부실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특성화고까지 전기에 선발하기 때문에 고교의 수직적 서열화가 생기고 후기에 남는 학생들이 일반고에 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학습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몰린다는 뜻이다.
“교과중점학교를 운영한 뒤 일반고가 활성화되고 학생들 맞춤교육을 한다는 건 긍정적이지만 일반고 내 또 다른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반고의 수평적 다각화를 위해서는 특수목적고나 자사고 등의 학교 자체 선발권을 없애고 다양한 수준의 학생들이 일반고에서 함께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사회 양극화를 없애고 자신과 상황이 다르거나 여러 재능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며 어울려 살 수 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