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노답 세대-80대 할머니 이어주려 ‘시간을 잡은 소녀들’

등록 2016-03-21 19:33수정 2016-03-21 19:33

1.  전북 완주 고산고 학생들이 ‘널리널리 홍홍’ 가게 주인장 장미경씨와 자신들이 만든 잡지 <시간을 잡는 소녀>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1. 전북 완주 고산고 학생들이 ‘널리널리 홍홍’ 가게 주인장 장미경씨와 자신들이 만든 잡지 <시간을 잡는 소녀>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독립잡지 <시잡소> 펴낸 여고생들

“선생님이 나더러 ‘노답’이래요. 진짜 ‘발암’이네요. 그냥 ‘개샹 마이웨이’ 할래요.”

“너 지금 뭐라는 거니? ‘말짓’하지 말고 ‘개로우’니까 ‘싸게’ 여기나 좀 긁어봐.”

요즘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은어와 어르신들이 쓰는 옛날 전라도 사투리를 손녀와 할머니의 대화 형식으로 기자가 지어낸 것이다. 둘 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이 대화에 나온 단어들은 전북 완주군 고산면 고산고 여학생 네 명이 만든 <시간을 잡는 소녀>(이하 시잡소)에 실린 것이다. 애늙은이과면서 4차원인 문은혜, 귀여운 소녀지만 입이 다소 거친 편인 권오영, 셀카 여신이자 부모님을 잘 돕는 주부 9단 심소희, 고전적 머리스타일을 한 ‘조선시대 여인’ 임예빈양은 지난 1월 시잡소를 창간했다.

“잡지를 어르신이나 청소년들 모두 볼 텐데 누가 봐도 공감이 가야 재미있어 하고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했다. 모두의 이야기를 아우르면서 서로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싶었다.”

하교 후 집으로 가는 버스 기다리며
친분 쌓은 완주 고산고 학생들
지역 공동체 물품 가게 주인장 제안해
‘세대 간 격차 줄이자’ 뜻 담은 잡지 창간

은어풀이 사전·할머니 비녀 속 사연 등
노년세대·청소년 소통 돕는 내용 담아

2. '시잡소' 표지 이미지.
2. '시잡소' 표지 이미지.
잡지를 들여다보니 여고생들만의 발랄함이 돋보인다. 노란색 표지는 캘리그라피로 직접 쓴 제목과 독특한 포즈의 단체사진으로 꾸몄다. 실제 찍은 사진을 포토샵으로 윤곽만 따낸 것이다. 각 페이지 숫자 옆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뜻을 담아 직접 그린 깜찍한 모래시계 그림이 있다. 표지 뒷면에는 ‘이 잡지는 디지털세대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든 300부 한정판-2000냥’이라고 써 있다.

지난 14일 만난 소녀들은 인터뷰 자체를 신기해하면서도 왁자지껄 자신들의 색깔을 마음껏 드러냈다. 예빈양은 “시잡소는 과거와 현재를 잡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 사이 시간의 간극을 줄여보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를 위해 ‘은어풀이 사전’ 꼭지를 만들고 일명 ‘요즘 것들의 말’과 ‘구수한 말’(일명 전라도 어르신들의 언어)의 뜻풀이를 실었다. 언어의 벽을 허물고 세대를 엮어보자는 시도였다. 사전에 나온 설명 대로 앞에 나온 대화의 뜻풀이를 정확히 해보자면 이렇다.

“선생님이 나더러 답이 안나온다고 했어요. 진짜 암 걸릴 것처럼 답답하네요.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아야겠어요.”

“너 그게 무슨 말이니? 말썽 부리지 말고 가려우니까 빨리 여기나 좀 긁어주라.”

3.  ‘할머니의 비녀’ 기사를 취재하던 도중 윤옥례 할머니가 직접 오영양의 머리를 비녀로 쪽지어 주고 있다.
3. ‘할머니의 비녀’ 기사를 취재하던 도중 윤옥례 할머니가 직접 오영양의 머리를 비녀로 쪽지어 주고 있다.
여고생 4인방은 처음 우연한 계기로 뭉쳤다. 시골이다 보니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가 멀었다. 집에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꼴.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근처 고산미소시장 안 ‘널리널리 홍홍’(이하 홍홍)에 모여들었다. 지역 창업공동체들의 물건을 모아서 판매하는 가게였다. 이곳 주인장은 아이들과 영상, 미디어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장미경씨. 그는 ‘마을 사랑방’ 구실을 하는 홍홍에 모인 아이들에게 잡지 제작을 제안했다. 하릴없이 와서 수다만 떨다 가느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벌여보자 했던 것.

아이들은 장씨의 말에 재미삼아 잡지 제작을 시작했다. 제호를 정하고 콘셉트를 잡고 세부 꼭지를 구성했다. 표지 디자인도 직접 했다. 각자 글쓰기나 삽화, 디자인 등 관심 있는 분야를 자연스레 맡았다. 디자인 작업을 주로 한 은혜양은 “도서관에서 ‘인디자인 프로그램’ 관련 책을 찾아 독학했는데 너무 어려웠다”며 “마을소식지를 만드는 미디어공동체 ‘완두콩’ 협동조합 사무실에 가서 디자이너에게 익스프레스 프로그램을 직접 배웠다”고 말했다.

옛것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시선은 다양했다. 특히 예빈양의 외할머니를 인터뷰한 기사 ‘할머니의 비녀’는 참신했다. 평생 엉덩이까지 기른 머리를 비녀로 쪽진 채 살아오신 윤옥례 할머니(85). “밭일하다 귀한 금비녀를 잃어버려 젓가락을 찌르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큰딸이 은비녀를 사가지고 왔더라. 아직도 그 비녀를 쓰고 있다.”

소녀들은 할머니 이야기를 통해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은 뒤 말린 동백꽃 기름을 짜서 발랐다. 그렇게 해야 반질반질 해지기 때문이다”라는 당시의 머리카락 관리법도 알게 됐다. 오영양은 “할머니가 이야기하면서 직접 비녀로 내 머리카락 쪽을 지어줬는데 길이도 짧고 머릿결이 너무 부드러워서 잘 안됐다”고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비녀를 사용하기 좋은 조건’이라는 제목의 팁도 실었다. ‘기름기가 없어야 머리가 뻣뻣해 비녀가 흘러내리지 않는다’, ‘머리가 길어야 여러번 꼬아서 비녀를 꽂기 적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물건인 필름카메라로 고산읍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일명 ‘과거로 찍은 현재’ 꼭지다. 마을 어른들이 기증한 펜탁스, 미놀타 토크맨 등의 카메라를 사용했다. 평소 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마구 찍고 확인한 뒤 바로바로 쉽게 지웠다. 하지만 필름카메라를 든 뒤 어떤 장면을 담을지 찬찬히 생각했다. 동네사진관에 현상을 맡긴 뒤 기다리는 것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붙드는 일이었다.

은혜양은 “수정을 못하니까 사진 찍을 때마다 긴장했다. 한 번 찍고 필름이 몇 컷 남았는지 세어 보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고민하며 셔터를 눌렀다”고 말했다.

장씨는 아이들이 최대한 주도적으로 나서 즐기게 하려고 닦달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마을 주민들에게 소문을 내는 거였다. 아이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잘했다고 응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입시와 관련한 진로활동에만 치중하며 스펙 쌓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시잡소 여고생들은 학교에 알리지 않고 순수하게 ‘재미와 자율’로 잡지를 제작했다.

“학교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부추기며 우리더러 무조건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한다. 하지만 잡지를 만들면서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는 것도 알고 친구들로부터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견들도 접하게 됐다. 친구가 경쟁 상대가 아니라 좋아하는 걸 나누고 협력할 수 있는 동료라는 걸 느꼈다.” 이들은 예상외의 뜨거운 반응 속에 현재 2호를 준비 중이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