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2016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에 참가한 정희현양이 결승 진출자에게 수여하는 메달을 걸고 다른 참가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윤선생 제공
‘2016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 현장
2013년 백악관 옆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스펠링비’(Spelling Bee) 대회가 열렸다. 말 그대로 단어 발음을 듣고 정확한 철자를 맞히는 게임이다. 100년 전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워싱턴의 언론인들이 했던 것을 기념해 재연한 것이다. 이 대회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도 하고, <뉴욕 타임스>에는 기사로도 실렸다. 국회의원과 언론인 각각 10명이 팀을 나눠 겨뤘는데 당시 버지니아 국회의원이던 팀 케인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현재 미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러닝메이트로 꼽히는 인물이다.
영어 발음 듣고 철자 맞히는 대회
미국에서는 전통 게임으로 알려져
올해 10여개국 284명 참가한 가운데 한국대표 희현양 최초 결승 진출도
단어만 많이 외운다는 지적도 있지만
사전 활용해 원어민 발음 반복해 듣고
어원에 따른 철자 패턴 공부하자
그 나라 역사·문화 공부도 하게 돼 스펠링비에서 ‘bee’는 ‘(일과 놀이를 함께하는) 모임’이란 뜻이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전통적으로 즐겨오던 게임이다. 우리로 치자면 받아쓰기나 끝말잇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갖지 말라고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철자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 온라인 대화를 할 때도 철자를 틀리게 쓰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깎아내린다. 올해 89회째인 ‘2016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NSB)가 현지시각으로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워싱턴디시에서 열렸다. 단어의 발음을 듣고 철자를 알아맞히는 방식으로 참가자는 단어의 정의·어원·품사·예문 등을 물어볼 수 있다. 실생활에 쓰이는 단어도 출제됐지만 결승전에서는 사전에서나 접했을 만한 단어나 발음만 듣고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철자의 단어가 등장했다.
미국·캐나다·가나·자메이카 등 10개국 284명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 지난 2월 한국 대표 선발전에서 각각 우승과 금상을 차지한 정희현(세종 양지중1)양과 정수인(부산외국인학교1)양이 출전했다. 특히 정희현양은 한국 대표 최초로 45명이 뽑힌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영어교육 전문기업 윤선생이 이 대회를 후원한 지 8년 만이다. 정양은 “이전 라운드까지는 절반 이상이 원래 알거나 어느 정도 감으로 맞힐 수 있는 단어였는데 결승 1라운드에서 떨어졌을 때 들었던 ‘vulsellum’(쌍구 겸자)이란 단어는 처음 들어본 것”이었다며 “아쉽지만 내 목표였던 결승 진출을 이뤄서 기쁘다. (대회 참가 자격이 중2까지라) 내년이 마지막인 만큼 다시 도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수인양은 예선 2라운드에서 ‘cyrillic’(키릴 문자의)이란 단어의 철자를 맞히지 못해 탈락했다. 올해 두번째 도전을 했던 그는 “내년에는 ‘톱10’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할 생각이다. 큰 대회에 참가한다는 의미도 크지만 다른 스펠러들을 사귀고 에스엔에스(SNS)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값진 경험”이라고 말했다.
대회에 출제되는 단어는 약 3000개다. 이 단어로 10개 리스트를 미리 만든 뒤 컴퓨터가 랜덤으로 단어를 뽑아 출제한다. 공정성을 위해서다. 참가자들은 스크립스사에서 나눠주는 공식 자료나 이전 대회에 출전된 단어 리스트를 찾아 공부한다.
이 대회를 두고 단순히 단어를 많이 외우는 데만 치중한다는 지적도 있다. 단어 뜻을 몰라도 어원이나 정의 등을 물어 철자를 추측해 맞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대회 출제자인 자크 베일리 박사는 “뜻까지 알고 맞히면 더 좋지만 철자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단어를 익힐 수도 있고, 나중에 생활하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어원을 따져서 대충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정희현양도 “예선 지필시험에서는 뜻을 알아야 맞힐 수 있는 문제도 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단어를 많이 아는 것 자체를 떠나 단어를 폭넓게 이해하면서 읽고 쓰는 능력도 길러졌다”고 했다. “러시아어가 어원인 단어를 공부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의 중진인사를 뜻하는 ‘apparatchik’란 단어를 배웠다. 단어를 통해 러시아 역사도 알게 됐다.”
이번 대회 우승은 인도계인 자이람 하스워(13)와 니하르 장가(11)가 차지했다. 특히 자이람은 2014년도 공동 우승자인 스리람 하스워의 친동생이라 주목을 받았다. ‘feldenkrais’(신체의 인식 능력을 향상시키고 긴장을 완화하려고 의도하며 도움을 받아 행하는 신체 동작의 체계)란 챔피언 단어를 맞힌 자이람은 “우승할 줄 몰랐는데 얼떨떨하다. 형의 조언대로 어원에 따른 철자의 독특한 패턴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 버몬트대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출제자 베일리 박사는 81년도 스펠링비 대회 우승자다. 그는 “평소 단어 공부를 할 때 원어민의 발음을 듣고 철자를 익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 학생들은 영어권에 살지도 않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원어민의 발음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음에도 대회에서 이렇게 잘하는 걸 보면 놀랍다”고 했다.
단순히 스펠링비 대회 준비가 아니더라도 단어 공부를 할 때 온라인 사전을 활용해 단어의 발음기호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메리엄-웹스터 누리집(www.merriam-webster.com)에 가면 기계음이 아닌 원어민이 직접 녹음한 단어의 발음을 들을 수 있다. 여러번 반복해 듣고 따라하다 보면 귀에 익숙해져서 단어를 쉽게 까먹지 않는다.
사전으로 공부하면 단어의 어원을 통해 단어가 발음되는 소리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 출제 단어는 모두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메리엄-웹스터 총괄편집자인 피터 소콜로스키는 “영어는 그리스·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 등에서 건너왔다. 어원마다 독특한 발음체계가 있다”고 말했다. 가령, 샴페인 할 때 ‘슈’라는 발음은 영어로는 ‘sh’, 프랑스어는 ‘ch’, 독일어는 ‘sch’, 이탈리아어는 ‘c’로 다른 철자를 쓴다. 이 단어의 어원이 프랑스어인 걸 알면 샴페인이 몰랐던 단어라도 정확한 철자인 ‘champagne’를 추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양을 비롯한 스펠러와 대회 관계자들은 참가자들이 이 대회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때로 순간적 판단과 운도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룰이 공정하다. 무엇보다 이 대회는 스펠러들끼리의 경쟁이 아니라 나와 사전이 겨루는 것이다. 자신과 단어의 한판 승부인 셈이다. 단어의 어원을 따라가며 배우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 또다른 재미다.”
워싱턴/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기자
lotus57@hanedui.com
미국에서는 전통 게임으로 알려져
올해 10여개국 284명 참가한 가운데 한국대표 희현양 최초 결승 진출도
단어만 많이 외운다는 지적도 있지만
사전 활용해 원어민 발음 반복해 듣고
어원에 따른 철자 패턴 공부하자
그 나라 역사·문화 공부도 하게 돼 스펠링비에서 ‘bee’는 ‘(일과 놀이를 함께하는) 모임’이란 뜻이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전통적으로 즐겨오던 게임이다. 우리로 치자면 받아쓰기나 끝말잇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갖지 말라고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철자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 온라인 대화를 할 때도 철자를 틀리게 쓰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깎아내린다. 올해 89회째인 ‘2016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NSB)가 현지시각으로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워싱턴디시에서 열렸다. 단어의 발음을 듣고 철자를 알아맞히는 방식으로 참가자는 단어의 정의·어원·품사·예문 등을 물어볼 수 있다. 실생활에 쓰이는 단어도 출제됐지만 결승전에서는 사전에서나 접했을 만한 단어나 발음만 듣고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철자의 단어가 등장했다.
기자 공동 우승을 차지한 자이람 하스와(왼쪽)와 니하르 장가. 윤선생 제공
이 대회에 참가한 정수인양이 출제 단어를 듣고 철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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